‘피는 물보다 진하다’.
언론계 역시 이 평범한 명제에서 예외가 아니다. 동아, 조선, 한국 등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사는 ‘세습 경영’이 관행화되어 있다. 가족회의가 곧 대주주 회의이고 장자 승계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언론자본의 세습 경영은 대략 3대를 헤아린다. 방응모, 김성수씨등이 ‘창업 1세대’라면 방일영, 김상만, 방우영씨등을 ‘2세대’들로 꼽을수 있다. 이들은 언론사 경영 일선에서 지금은 물러나 있다.

동아 김 전회장은 93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지난 93년을 전후로 제3세대들이 언론사 경영의 전면에 나섰다.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장강재 회장의 죽음과 함께 경영권을 승계한 한국일보 장재국 회장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장 회장은 장기영 창업주의 4남이다.

최근에는 4세대 언론경영진들이 경영수업을 위해 언론사에 진입하고 있거나 진입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아직 이들은 ‘예비 경영진’에 불과하다. 나이나 연륜이 적은만큼 이들은 이제 시험대에 선 입장이다. 따라서 이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과’가 없는한 이들이 한국언론을 책임질 차세대 경영진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점에서 ‘4세대’들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동아일보와 한국일보, 국민일보를 중심으로 ‘차세대 언론사주’들의 오늘을 들여다본다.


지난 94년부터 95년 8월까지 동아일보 사보 ‘동우’지는 이례적으로 장기 연재물을 실었다. ‘아사히 신문’ 연수기가 주제였다. 필자는 김재호(33). 김씨는 다름아닌 김병관 회장의 장남이다. 동아일보 직원들에게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말하자면 사보의 기획물은 신고식이었던 셈이다.

김씨는 95년 아사히 신문 연수를 끝마치고 동아일보에 입성해 신동아부, 기획실, 정보통신부를 거쳐 지금은 사회부에서 경찰기자로 취재현장을 누비고 있다. 경복고를 졸업한 김 기자는 미국 보스턴대학과 테네시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끝마치고 게이오대에서 1년간 학업 연수를 했다. 이한동 전 국회의장의 사위이기도 하다.

주위평판에 노심초사

김 기자는 특히 정보통신부 시절 인터네트로 취재를 하는 등 전자신문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당초에는 한달 예정이었으나 6개월이 넘게 정보통신부에 근무했다. 이를 반영하듯 지금도 뉴미디어 문제와 관련해서는 김회장에게 상당한 조언을 하는 등 전문가 버금가는 소양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회장 아들이자 장차 ‘대권’을 맡을 것이 뻔한 사람에 대한 동료기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한 기자는 “일반기자들 대하듯 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스스럼 없이 대한다. 데스크의 취재지시도 외형적으로 보면 다른 기자들과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 기자는 수차례 기사수정 지시를 받는등 ‘일정한 강도’의 기자수업을 받고 있다. 김 기자가 아버지와는 달리 편집국에서부터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것과 관련, 재미있는 해석도 있다. 김 회장이 판매와 광고쪽만 거쳐 이른바 ‘편집국 콤플렉스’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다.

김 기자의 성격은 한 마디로 겸손하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앞으로 자신들의 인사권을 틀어쥘 ‘차기 사장’ 앞에서 부담을 안 가질수 없다.
1년간의 연수기간내내 김 기자를 관리했던 아사히신문의 다메다 에이 이치로 아사히신문연구소 부소장과 구리하라 겐타로 정치부기자는 사보에 기고한 ‘김재호 관찰기’에서 공통적인 평가를 내렸다. “집안 배경이나 성장과정에 비해 소탈하고 인간적이라는 것, 그리고 샌님티가 안난다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

이미 경영수업이 시작된 동아에 비해 한국일보나 국민일보는 아직 ‘후세 경영진’들이 신문사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해당 신문사 기자들은 이들의 입성이 조만간 현실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민일보의 경우는 그 징후가 뚜렷하다.

지난 4월 국민일보 경영난을 타개하기위해 신동아, 해태그룹 등 일부 재벌사의 자본을 유입하려다 ‘백지화’시킨 것은 조용기회장(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의 ‘장자 승계’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게 회사 내부의 분석이다. 현재 일본에 체류중인 조희준씨(34)가 그 주인공이다.

조씨는 일본에서 개인기업체를 운영중이며 병역문제가 귀국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기 탤런트였던 나모씨와 결혼했다가 이혼해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도 했던 조씨는 국민일보 경영에 강한 의지를 내보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경영진이 추진했던 일부 재벌사의 자본 유입도 그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것이 일부 기자들의 추측이다. 지금의 어려운 경영문제를 단기간내에 개선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도 했다는 후문이다.
조용기회장이 희준씨에게 쏟는 관심도 각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다른 부유층 자녀들과는 달리 그다지 순탄치 못한 인생행로를 걸은 것을 두고 사석에서 “내가 잘 돌보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지난해 노사갈등을 유발하다 결국 사장직에서 물러난 이건영씨도 부임초기 희준씨와의 두터운 친분과 그의 지원이 결정적으로 사장으로 올수 있었던 배경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조씨는 일본에서 주식투자 등을 통해 적지 않은 수익을 올리는 등 경영 수완도 만만치 않다는 후문이다.

장자승계 욕심 앞서기도

한국일보는 고 장강재 전 회장의 장남 중호씨(25)가 관심 대상이다. 장씨는 미국에서 대학과정을 끝마치고 현재 한국에 체류중이다. 최근에는 한국일보에도 자주 드나드는 등 대학 졸업과 함께 행동반경이 더욱 넓어지고 있다는 관측이다. 장씨는 고 장강재회장이 한국일보 전체 주식의 20%를 물려주었고 백상재단에 기부한 15%의 주식도 사실상 중호씨 몫으로 해석되고 있다. 백상재단은 고 장회장의 부인인 이순임씨(예명 문희)의 ‘관할‘아래 놓여 있다.

한국일보는 중호씨의 신문사 입성을 둘러싸고 상당히 예민한 반응이다. 무엇보다 장기영씨의 4형제들이 9%씩의 주식을 나눠갖고 있어 주주들의 의견 집약이 어려운데다 자칫 경영권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날수도 있다는 우려의 시각들이 그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증권가에선 한국일보 경영권과 관련한 루머가 심심치 않게 나돌기도 한다. 현재 한국일보 안팎에선 이순임씨의 오빠인 한국문원 이모사장과 일부이사들을 중호씨의 ‘대리인’으로 보고 있다.

동아, 한국, 국민을 제외한 대부분이 신문사들은 ‘후세 경영’과 관련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다. 경향, 중앙, 문화 등은 재벌사 소유인만큼 어차피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지할 수 밖에 없고 조선은 ‘후계 구도’를 거론하기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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