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이후 언론계에 나타난 가장 커다란 변화는 신문들의 무한경쟁이 가속화되고 상업방송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특히 상업방송의 등장은 전두환 정권하에서 누적되어 왔던 이른바 공영방송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던 방송민주화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6·29 직후인 1987년 11월에 시행된 새 방송법만 해도 방송위원회의 권한강화 등을 규정하여 공영방송의 정상화에 중점을 둔 듯 보였다. 그러나 방송위원회 위원 임명 방식이 바뀌지 않았다는 점 등 때문에 새 방송법도 방송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유지하려는 방향에서 제정됐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새 방송법은 전두환 정권하에서의 편파·왜곡방송, 저질적 프로그램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았던 공영방송체제를 개선, 유지한다는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방송정책의 골격은 90년에 들어서서 급격히 변화되기 시작했다. 90년 노태우 정권은 공영방송체제가 80년 방송통폐합의 산물이므로 90년대 우리 사회의 체질에 맞는 방송구조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방송법 개정과 방송 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방송위원회의 권한 약화와 상업방송의 허용 등에 대한 방송 3사 노조와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당의원들만 참석하여 방송구조 개편안의 날치기 통과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87년 방송법을 통해 방송위원회에 부여됐던 권한들이 약화되거나 소멸됐다.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보처의 권한이 강화되어 방송에 관한 정책 심의·결정권이 공보처로 이관됐다.

이렇듯 90년 방송법 개정을 통해 이뤄진 방송위원회의 권한 약화와 공보처의 권한 강화는 방송에 대한 국가의 재지배 의도에서 비롯됐던 것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87년 방송법에서 그대로 유지됐던 공영방송체제도 상업방송의 허용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됐다. 방송기술 발전에 따른 전파개방, 채널 선택의 다양성 보장, 선의의 경쟁을 통한 방송발전, 선진국의 규제완화 추세 등의 명분을 내세우며 상업방송의 허용을 표방했던 방송구조 개편안은 사실상 경쟁구조의 확립을 통해 간접적 방식으로 방송통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88년부터 본격화된 방송민주화 운동을 겪으면서 노태우 정권은 방송구조 개편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됐다. 노태우 정권은 방송구조 개편안의 ‘형식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송위원회가 위촉하는 민간기구 성격으로 ‘방송제도연구위원회’를 89년 5월에 발족시켰다. 90년 3월 이 위원회는 상업방송 허용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고, 정부는 6월 14일방송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90년 방송법 개정과정은 야당이나 방송노조, 시청자단체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 통과시켰다는 문제점 뿐만 아니라, 방송법 개정연구를 위해 구성됐던 방송제도연구위원회의 최종 보고서 내용중에서도 다른 여러 제안을 배제하고 오로지 상업방송의 허용안만을 받아 들였다는 문제점도 드러냈다. 따라서 이 위원회가 단순히 법 개정의 들러리 역할을 하고 말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다매체·다채널이라는 새로운 방송환경의 변화속에서 전파 개방이 불가피했던 측면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90년 방송법 개정이 방송민주화운동의 활성화로 방송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위협받던 시점에서, 국가의 방송에 대한 통제력 회복이라는 기본 방향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볼 때, 상업방송의 허가는 결국 방송시간의 시청률 경쟁을 심화시켜 국가의 방송통제를 위협하던 방송민주화운동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상업방송의 허용은 노태우정권 초기의 재벌에 대한 규제가 90년대에 들어서서 급격히 변화되어 ‘자본과의 결합과 연대’가 강화됐던 상황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상업방송의 허가는 방송에 대한 국가의 개입방식이 직접적인 내용규제에서 시장경쟁구조에 맞는 허가·재허가, 인사를 통한 간접적 개입의 형태로 중점을 옮겼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6·29 이후 나타난 사회 전반의 변화로 인해 방송에 대한 국가의 통제방식이 다소 변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 대한 국가 개입의 실질적인 내용이 변화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방송구조의 개편과정에서 90년에는 평화방송, 불교방송, 교통방송이 개국했고 교육방송이 KBS에서 독립했다. 91년에는 서울방송이 3월에 라디오, 12월에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했다. 이런 방송구조 개편의 내용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서울방송의 등장이었다. 태영이 지배주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6공 실세들이 직접 간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등, 서울방송의 허가가 ‘6공 비리’의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상업방송인 서울방송의 등장으로 방송 3사는 치열한 경영체제로 돌입했고 이에 따라 방송민주화운동은 소강 국면을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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