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국학 연구가들중 가장 방대한 저술을 낸 브루스 커밍스 교수(노스웨스턴대)가 최근 ‘한국의 학계로비’라는 논문을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커밍스는 과거 한국의 군부정권이 연구비를 미끼로 비판적인 학자들의 입을 막았다고 폭로했다. 이 논문은 권력자들이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유린해온 한국의 후진적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권력에 의한 강제뿐만 아니라 금력의 유혹과 매수 등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개인의 견해를 가공하려는 풍토가 한국사회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른바 문민정부의 국제교류재단 책임자가 미국에서 과거 군부정권의 로비에 앞장섰던 인물이었음이 이 논문에 적시돼 진상조사가 요구된다.

커밍스가 지적한 한국의 연구비 로비 무대는 미국 학계다. 이것으로 미루어 한국 내부상황은 새삼 따져볼 필요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런 독재권력 아래서 살았던 한국의 학자·문인·언론인 등은 창의적인 탐구와 표현의 자유를 잃어버린 로보트에 불과했다는 해외지식인들의 눈초리가 너무도 차갑다.

커밍스가 비판한 대상은 돈을 준 한국측과 이를 받은 미국내 연구기관 및 학자들이다. 한국의 돈줄은 무역협회산하 산학협동재단과 국제교류재단(전 국제문화협회)이었으며 그 배후에서 중앙정보부(후에 안기부)가 돈의 용처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십분 짐작이 가고도 남는 얘기다.

한국의 로비성연구비를 받아왔다고 그가 거명한 미국의 연구기관은 자신이 관계했던 워싱턴주립대학과 시카고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명대학들이다. 또 미국의 아시아학계 원로인 로버트 스칼라피노 전 버클리대교수도 한국 군부정권 시절 미국내 로비 창구로 크게 비판받았다.

커밍스는 미국의 학자들이 한국측으로부터 연구비나 초청방문을 받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를 두가지로 내세우고 있다. 하나는 기본적으로 학자가 자신의 연구대상으로부터 자금을 받아서는 객관적인 견해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돈을 주는 한국측이 특히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다. 한국의 외교관이나 해외공보관들은 주재국 언론의 한국관련 논조까지도 일일보고하며 이에 대한 반박 등을 강구하고 있다고 썼다.

커밍스는 유신쿠데타 직후인 지난 73년 봄 박정희대통령의 얼굴사진을 시사주간지 <타임>이나 <뉴스위크>에 게재하기 위한 한국측의 로비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73년 봄 알렉산더 김(다른 이름 김경원)이 동부의 한 유명대학 교수와 만나기위해 들렀다. 그는 박정희의 사진을 <타임>이나 <뉴스위크>의 표지로 게재하게 해준다면 5만달러를 제공하겠노라고 이 교수에게 제의했다.”

이는 지난 76년 미국 정계를 뒤흔들었던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조사한 미의회 청문회내용을 자료로 삼은 것이다. 당시 5만달러는 큰 돈으로 인류학자의 한 프로젝트 연구비가 최고 2만5천달러 정도였다.
커밍스는 한국의 문민정부가 발빠른 개혁작업을 벌이고 있으며 지금이 군부독재 유산을 완전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는 그러나 군부정권시절의 학계 로비도 이제 구태를 벗었다는 한국 학자들의 언급을 반신반의하면서 인용했다. 박정희 홍보에 앞장섰던 인물이 문민정부 아래서 국제교류재단의 책임자로 기용됐다는 사실을 그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더욱이 그런 군부정권의 ‘부역자’가 문민정부 최고위층의 인척이라는 배경 등으로 여러 요직에 중용됐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나면 또 얼마나 한국의 질긴 과거사 폐습을 비아냥거릴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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