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메넴은 프랑크 시나트라가 불러 유명해진 ‘마이 웨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그 노래가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위대한 노래라고 극찬한다. 그는 이 노래를 각기 자신의 개성을 살려 부른 여러 가수들의 음반을 15장이나 갖고 있을 정도다.

메넴은 현실과의 타협거부를 예찬하고 있는 이 명곡이 자신의 ‘문민독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집권 이후 의회를 무시하는 정치를 해왔다. 그가 집권 이후 3년간 발동한 ‘긴급조치 포고령’만 해도 1백여 차례가 넘는다. 그의 전임자인 라울 알폰신이 5년반 동안의 재임기간 중 단지 8차례에 걸쳐 긴급조치권을 행사했던 것에 비하면 메넴의 ‘마이 웨이’는 알아줄 만 하다.

독선의 정당화

페루 대통령 후지모리의 독선도 만만치 않다. 그는 정당과 의회를 무시하고 민중과의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얻은 지지를 무기로 군부마저 무력화시킨 이른바 ‘신독재’를 선보였다. 그는 92년 4월 5일 친위쿠데타를 성공시킨 뒤에 구정치인들을 정치 현장에서 몰아내고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대대적인 경제개방 및 자유화 조치를 추진했다.

후지모리는 친위 쿠데타 이후에도 여전히 정당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국민과 직접 대화하는’ 민중주의적 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심지어 “정치적 정당들에 의한 민주주의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그는 자신의 독재가 정당들에 의한 party-ocracy에 대항해 국민에게 이익을 주는 democracy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권을 장악한 자신의 통치가 라틴아메리카에 어울리는 새로운 통치모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민들 다수가 후지모리의 신독재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 및 정정불안에 지친 국민들은 절차가 어떻든간에 빠른 해결을 바라는 경향이 강하다. 시국에 대한 위기의식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감을 높여주고 이 높아진 기대감은 다시 대통령의 초법적 권한을 강화시켜 주는 것이다.

후지모리식의 독재는 다른 중남미 나라들에도 수출되고 있다. 93년 5월 과테말라 대통령 호르헤 세라노는 의회와 대법원을 전격 해산하고 헌정을 부분적으로 중단, 포고령에 의한 대통령 전권 통치를 선언했는데, 이는 후지모리 수법을 그대로 빼박은 것이었다.

볼리비아, 베네주엘라, 멕시코, 브라질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멕시코의 역사는 대통령 개인의 퍼스낼리티에 의해 좌우되어 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중남미의 대통령제에는 견제와 균형이 없어 이를 ‘시저주의’ 또는 ‘수령주의(Caudillismo)라고 명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남미의 ‘제왕적 대통령’은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국민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국민의 지지라고 하는 것이 대중매체에 의해 ‘제조’되는 경우다. 중남미의 대통령들은 대부분 텔레비전을 장악해 최대한 활용하며 모든 언론매체의 관심을 독점한다. 이런 여론 형성 구조가 그들의 ‘마이 웨이’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도 ‘제왕적 대통령’이라 할만하다. ‘문민정부’ 들어 형식은 나아졌지만 내용은 여전하다. 김영삼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실제로 선구자형 정치를 하고 있다. 텔레비전도 장단을 맞춘다. 텔레비전은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외국신문이 김대통령을 극찬한 것을 뉴스 첫머리에 크게 보도하곤 한다. 중남미 국가의 텔레비전도 민망해서 하지 않을 짓을 수시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중남미와 한국의 차이

문제는 지금 우리의 상황이 과연 ‘마이 웨이’나 ‘선구자’형 정치를 필요로 하는가 이다. 지금 우리가 무장 게릴라가 수시로 출몰하는 중남미의 상황인가?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의 혐오와 증오를 키우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정당정치를 깔아 뭉개며 ‘제왕적 대통령’의 ‘마이 웨이’에 의존해야 할 상황인가? 우리 모두 노래방에 가서 ‘마이 웨이’를 부르건 ‘선구자’를 부른건 그건 자유지만 어깨에 힘은 좀 빼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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