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아산에서 농사를 짓는 64살의 김 모씨. 논일을 끝내고 일찌감치 저녁식사를 마친 뒤 피곤한 다리를 주무르며 TV 앞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기 위해 뉴스를 시청한다. 뉴스 속의 정치권은 얼마 전에는 국회를 여네, 못여네 여야가 서로 싸움만 하다가 겨우 국회 문을 여는가 싶더니 이제는 국회 안에서 정당 간에 서로를 헐뜯는데에 거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씨는 그래서 우리나라 정치권은 국민들 돈만 축내는 몹쓸 집단이라고 생각을 굳힌다.

이어지는 뉴스의 화면은 호화 외제가구로 가득 채워진다. 멋진 수입차가 진열돼 있는 모습도 보인다. 외국에 놀러 가는 사람들로 가득찬 김포공항의 모습도 보인다. TV 속의 기자는 우리 국민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호소하고 있지만 김씨는 도시 사람들이 정말로 돈도 많고 잘 산다고 생각할 뿐이다.

방송의 국민 계도적 역할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도를 넘을 경우 왜곡된 방송의 피해를 경험한 바 있는 시청자들은 이제는 역겨움을 느낄 뿐이다. 최근 각 방송사가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과소비 풍조에 대한 소식들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노사문제가 최대쟁점으로 떠올랐던 지난달 20일부터 지난 16일까지 방송 3사의 메인뉴스를 보면 KBS가 26건의 과소비 관련 보도가 나갔고 SBS 19건, MBC가 11건의 과소비 지적 리포트를 내보냈다.

이 가운데 KBS는 7월 3일과 4일, 5일, 7일 나흘동안 ‘과소비 이대로 되나’의 주제로 하루에 세꼭지씩 집중적으로 내보내 보도의 질과 양에 있어서 단연 발군의 실력(?)을 과시했다. 특히 이 기회 시리즈 가운데 파리와 뉴욕 시민의 검소한 생활을 이틀 동안 특파원 리포트로 내보내 우리 국민의 흥청망청한(?) 과소비 실태와 대비를 시켰다.

MBC의 경우에는 비록 리포트 수에 있어서는 다른 방송사들보다는 적었으나 우리 경제의 문제점을 시리즈로 기획하면서 경제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고임금 구조와 국민들의 과소비, 호화여행의 탓으로 돌려버렸다. SBS도 일찌감치 지난달 20일부터 ‘호화외제 가구 집단장’을 시작으로 한달여 동안 과소비 풍조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물론 과소비 풍조가 지적돼야 할 사항임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방송 뉴스의 과소비 지적은 과거의 보도와 전혀 다르지 않게 표피적·감성적인 접근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지적에 공감은 커녕 오히려 짜증을 유발시키고 있을 뿐이다. 과연 누가 흥청망청 소비를 하고 있는지 과소비의 주체를 전혀 짚지 않고 그저 현상만을 전달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위화감 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소비재의 수입이 무역적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수치 등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켐페인에 지나지 않는 리포트를 내보내 그렇지 않아도 가벼운 방송뉴스를 더욱 경망스럽게 만들고 있다. 노사문제로 시끄럽던 지난달 중순부터 우리 경제가 어렵다는 각종 관급기사가 쏟아진 뒤로 시작된 방송의 ‘과소비’ 뉴스는 관급뉴스를 바탕으로 해서 기획기사를 만들어 온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될 수 밖에 없다.

최근 방송의 과소비 관련 뉴스를 본 아산의 김씨 할아버지를 비롯한 대다수 시청자들은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사람들은 좋겠다” 또는 “나도 올해에는 해외여행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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