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말해져야 할 때 말해져야 한다.” 지난 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 언론인이 언론,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던진 고언(苦言)이다. 말과 글의 힘이 진정 어디서 나오는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으론 정작 사회적인 발언이 필요할 땐 침묵을 지키다가 사회적인 분위기나 대세에 편승해 뒤늦게 거들고 나서는 우리 언론과 지식인의 기회주의적 행태를 꼬집은 것이기도 하다.

새삼 언론과 언론인,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이같은 화두를 던지는 것은 최근 전개되고 있는 ‘신문전쟁’의 양상 때문이다. 이른바 ‘중앙일보 남원당 지국 신문판촉 살인사건’을 계기로 비재벌 신문들은 재벌언론의 병폐를 지적하면서 재벌의 언론 소유를 차단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재벌의 언론 소유가 우리사회의 여론과 정보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나아가 막강한 금력을 바탕으로 언론의 빗나간 물량위주의 상업주의 경쟁을 주도해 급기야 이번 ‘판촉살인’까지 야기했다는 것이다.
이번 판촉살인 사건의 피해당사자격인 조선일보를 비롯, 동아일보등은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에게 중앙일보에서 손을 뗄 것을 정면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들 신문들은 이와 함께 삼성그룹의 비리등을 집중적으로 보도, 삼성그룹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반면 가해자격인 중앙일보는 물론 경향신문, 문화일보등 역시 재벌들이 소유한 신문들 또한 이번 판촉 살인사건에 대해 어떠한 입장 표명도 없이 소극적인 보도로 일관해 대조를 보이고 있다.

재벌의 언론 소유의 문제점은 어제 오늘 제기된 것은 아니다. 뒤늦게나마 이들 신문들이 재벌언론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것은 그래도 환영할 만 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들 신문의 여론몰이에 선뜻 동의하고 나서기 어렵다. 한마디로 그 저의가 의심스럽고 그 방식 또한 언론의 정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신문들은 재벌 언론 해체론을 주장하면서도 그 대상을 중앙일보와 삼성그룹에 집중하고 있다. 재벌언론의 대표격이 중앙일보라 할 수도 있다. 본보기 사례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벌언론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대상을 중앙일보와 삼성그룹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중앙일보와 삼성그룹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벌의 언론 소유와 지배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는 사회적 여론 조성및 제도적인 대책 마련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

삼성그룹에 압박을 가하는 방식은 재벌의 언론소유에 대한 이들 신문들의 문제제기가 갖는 의미를 더욱 퇴색시키고 있다. 재벌의 입장을 옹호하고 재벌의 비리보도에 소극적이었던 평소의 보도태도와 달리 이번 사건과 관련, 삼성 비리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누가 봐도 보복성, 압박성 보도로 보여진다. 이런 보도태도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자기들의 이해다툼 때문에 벌이는 이전투구라고 평가절하하기 십상이다. 정작 중요한 재벌의 언론소유및 지배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과 사회적 동의를 끌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언론 전체에 대한 불신만 키울 우려가 적지 않다.

한 언론인은 이번 신문전쟁을 “재벌언론이 존재의 문제라면 언론재벌은 행태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재벌언론의 존재 만큼이나 재벌언론과 언론재벌을 포함한 언론 전반의 행태 또한 문제라는 비판이다. 공정한 신문 경쟁질서 확립을 위한 다양한 대안의 모색에 앞서 재벌언론, 언론재벌의 구별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들어왔던 언론 전반의 재벌 편들기, 권력 편들기에 대한 언론의 자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재벌의 언론 소유에 대한 비판적 여론과 사회적 견제방안을 온전히 모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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