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람되지만, 오늘은 사사로운 몇마디 넉두리를 허락해주기 바란다. 오늘, 나는 주체하기 어려운 참담함으로 이 글을 쓴다.
참담함의 첫번째 근원은, 깊은 부끄러움속에서도 그나마 끌어안아왔던 언론종사자로서의 얕은 자긍마저 무너져내리게 하는 충격의 풍경이다.

살인극을 빚어내기에 이른 이땅의 신문시장을 ‘야만의 사회’라고까지 몰아붙이는 언론학자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야만의 문명화’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야만의 사회’엔 회개의 문화가 자랄수 없는 탓인가. 아니면 회개의 문화가 없으므로 ‘야만의 사회’는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재벌언론 또는 재벌신문을 폭격하는 언론재벌 또는 신문재벌들은, 시장의 야만성을 모두 남의 일로만 휘몰아친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나도’ 또는 ‘우리도’라는 고해 한마디 보이지 않는다. 즐비한 글발속에서도 고해의 문맥은 찾아볼 길이 없다.

살인극이 빚어진 이후에도, 바로 살인극의 시장을 난타하는 신문재벌의 신문 ‘강투(强投)’가 자행되더라는 증언은 차라리 접어두기로 하자. 언론의 수용자이며 언론의 참주인이어야 할 이땅의 겨레는 신문시장의 강압성과 그 정글의 법칙을 익히 안다. 아니, 익히 안다기보다 몸소 체험해보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떤 신문재벌도 ‘나도’ 또는 ‘우리도’라고는 고백하지 않는다. 이제는 속된 말이 되어버린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손바닥’이 ‘하늘’처럼 찍혀 나오는 그 나날속에서 이땅의 겨레는 이땅의 언론이 스스로 드러내는 알몸을 확인한다.

재확인하고 또한 재삼 확인한다. 양심이라는 우리의 모국어를 욕되게하는 그 ‘양심’이라는 것, 진실이라는 또 하나의 모국어를 모독하는 그 ‘진실’이라는 것의 실체를 뚫어보며 전율한다. 나는 그 충격의 풍경이 슬프고, 슬프다 못해 참담하다. 그리고 그 참담함은 다시 언론종사자로서의 얕은 자긍마저 무너져내리게 하는 또 다른 참담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분명히 못박아두고자 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나는 재벌언론 또는 재벌신문을 두둔할 생각이 전혀 없다. 거의 평생의 삶으로 재벌신문과 신문재벌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바 아니다. 재벌신문은 어쩔수 없이 특정재벌의 이익이라는 사슬에 구속될 수 밖에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재벌을 비롯한 지배세력의 수구와 보수에 공헌하고자 한다. 물론 신문재벌은 특정재벌의 이익이라는 사슬에 묶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 재벌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정과 함께 광고의 수주등 경영적 동기로 말미암아 지배세력의 수구와 보수에 동조하기 일쑤이다. 그것이 오늘에 인식되는 ‘차이’일 뿐이다.

때문에 더욱 이땅의 언론수용자들은 재벌신문에 대한 신문재벌의 공격에 ‘손바닥’과 ‘하늘’의 혼란을 느낀다. 혼란을 넘어서고자 그 진정한 속셈을 헤아려보게 된다. 마침내는 또 한번의 왜곡을 실감하고 ‘야만의 사회’가 드러내는 또 다른 증상임을 진단하게 된다. 따라서 무슨 협의회의 자율결의나 판매감시기구 따위의 논의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풍파가 가라앉으면 다시 평지로 돌아가는 일진의 광풍쯤으로 체념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 ‘야만의 사회’를 어찌할 것인가. 겨레의 언론, 언론다운 언론을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그 물음앞에서 참담함의 두번째 근원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온 몸과 온 얼을 짓눌러 온다. 그 몸살속에서 피어오르는 답안의 하나가 이른바 신문공동판매제도이다.

‘야만의 사회’를 씻어내고, 언론의 수용자에게 언론의 선택권을 되돌리는 시장질서는 정당한 우리의 과녁일수도 있다. 더구나 열린 선택앞에서 저마다의 신문들이 차별성을 추구하는 제작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그러나 그 누가 고양이에게 방울을 달 수 있는가. 권력의 강제는 애당초 얘깃거리에도 끼어들수 없다. 그렇다면, 정작 그렇다면 그 몫은 누구의 것인가. 그저 교과서적으로 그 몫은 당연히 언론에 돌려야 한다고, 목을 늘어뜨리고만 있어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이미 이땅의 언론은 스스로 머리를 깎으려 하지 않는다. 깎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때문에 나는 어쩔수 없이 겨레의 힘과 겨레의 ‘견인’(牽引)이라는 처방을 떠올리게 된다. 공판제만이 아니라 신문재벌의 고질인 소유의 집중과 세습을 다스리고, 경영의 분리와 편집권의 독립을 다지는 길도, 역시 그 겨레의 힘과 ‘견인’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뿌리치지 못한다.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말해온 자가, 스스로 겨레의 힘과 견인을 말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현실이, 거듭 뼈저린 참담함으로 덮쳐든다. 언론종사자로서, 자긍을 함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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