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민중의 바다’로 거침없이 뛰어들어 그‘나침반’ 역할을 자임했던 진보매체들이 90년대의 ‘덫’에 걸려들었다.
격렬했던 이념과 논쟁의 파고가 잦아들고 역사와 사회를 향했던 눈들이 ‘개인’으로 움추러드는 시대적 변화의 물결속에서 ‘힘겨운 속앓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슴앓이속에서 새로운 모색은 움트고 있었다.
‘저 낮은 곳을 향해 떠났던’ 80년대의 여정에서 90년대의 현실과 맞는, 그리고 21세기에도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대안과 전망을 찾기 위한 고단한 여행길에 나선 것이다.

90년대를 설명하는 말과 논리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같은 다양한 논리의 밑바닥에는 ‘개인의 발견’이라는 공통분모가 놓여있다.
월간 <말> <사회평론 길> <내일신문>등 한국 진보언론의 맥을 잇고 있는 매체들은 이런 시대적 흐름에 맞춰 ‘인간탐구’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문화현상에 대한 추적,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에서 시대정신의 큰 흐름을 읽어내려는 특집과 기획이 많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진보매체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시대에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혁명과 개량이 논의되던 80년대의 진보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의 길목에 접어들은 지금, 그 진보의 무게중심은 이동하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다소 이데올로기적 색깔이 묻어나는 선전엔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진보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현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그 현실을 인정하지만 바뀌어진 진보의 구체적인 상은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점에 있다. 그것은 곧 진보매체의 고민으로 연결된다.

월간 <말>지 편집국 차장을 지낸 안영배씨(현 기자협회 편집부장)는 90년초까지만 해도 제도권 매체가 다루지 않는 ‘진보영역’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문, 인권, 노동등 시대의 ‘금기어’들은 진보매체가 아니면 감히 다룰 수 없는 또 하나의 성역이었다. 반미, 북한문제도 기존매체와 진보매체를 구별짓는 ‘단골메뉴’였다. 그 성역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그건 진보매체의 일차적 고민이자 긍극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진보란 무엇인가’란 화두를 푸는 힘겨운 작업이기도 하다.

80년대 초반 학번으로 언론연구원 정책연구실에 근무하고 있는 조동시씨는 “몇년전만해도 <말>지나 <사회평론 길>지를 찾아서 읽는 편이었는데 요즘엔 자주 안 보게된다. 시사저널, 뉴스 플러스, 한겨레21 등 시사주간지가 나름대로 ‘정직한 정보’를 주고 있는 탓도 있다” 고 말했다.

<사회평론 길> 윤철호 편집국장은 “진보언론이 다뤄왔던 많은 주제와 소재를 ‘제도화된 언론영역’에서 이미 상품으로 소화하고 있다”며 기존매체와 ‘차별성있는’ 편집방향을 설정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아니다”는 부정과 그 과정에서 빚어질 수 있는 자기희생을 감수할 용기만 있으면 독자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던 그런 ‘열정의 시대’가 지나가 버린 것이다. 어느새 그건 ‘낡은 것’이 돼버렸다. 월간 <말> 최진섭 취재부장은 진보매체 편집진이 “80년대식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최부장은 “진보를 지향하면서도 실제는 ‘옛날 이야기’에 머무르고 있다”는 한 독자의 편지가 요즘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고민의 핵심은 90년대의 ‘이념적 지평’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데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과 대안의 ‘가시적 형태’가 쉽게 찾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진보매체에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주류에 비판적 문제제기
일상성 주목통해 ‘우회로’


<사회평론 길>은 현실적인 우회로를 선택했다. 이 사회를 끌고 가는 ‘주류’의 흐름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통해 미래의 실마리를 풀어보려는 것이다. 새로운 그 무엇을 찾기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고민을 모으고 논의의 장을 제공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의 실체에 접근해 가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새로운 담론’ 형성으로 모아진다.

우선 기획이 길어졌다. 내용은 사건보다 흐름을 다룬다는 방침이다. 지난 6월호에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총체적 붕괴’가 6백매로 다뤄졌다. 7월호의 주제는 ‘80년대와 90년대는 무엇이 다른가’였다. 역시 8백매가 소요된 ‘대하물’이었다. 8월호에는 ‘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다뤄질 예정이다. 이런 기획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의미있는 변화’를 만들어낼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 가겠다는 것이다. 성공 여부는 미지수지만 일단 시도 자체는 신선해 보인다.

표지모델에서 정치인이 사라진 것도 변화다. 영화 꽃잎의 주인공인 이정현양이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유명인보다 일상속에서 비전을 개척해가는 사람들로 표지를 채우겠다는게 계획이다. 이 또한 <길>의 변화를 상징한다.


독자와 결합 밀도있게
문화섹션 등 폭넓은 시도



<월간 말>도 표현은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최진섭부장은 ‘모색을 위한 단서의 제시’라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그 경로는 독자와의 보다 밀도있는 결합이다. 최부장은 “독자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뭔가 잡히는게 있다. 그걸 추상에서 끝내지 않고 구체적인 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생각은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진지하게 추적하는 문화섹션의 시도로 나타났다.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흐름과 초점’ ‘주장과 대안’ ‘사람과 세상’으로 나눠서 보여주기도 한다. 7월호 표지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인 외국인 노동자였다. 곧 발간예정인 8월호 표지는 입양한 갓난아기의 사진으로 채워질 계획이다. <말>지의 관심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경제-지역문제에 몰두
여성 등 사회운동 무게중심


주간신문으로 진보언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내일신문>의 요즘 주요 관심사는 ‘경제’와 ‘지역’이다. 경제민주화와 지방화의 진전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문제라는 것이다. 거창한 이념보다 현실속에서 구체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겠다는게 이들의 생각이다.

스스로 이같은 구상의 모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창간때부터 내일신문 핵심멤버로 활동해온 윤태일 홍보실장은 “주주와 독자가 주인이 되는 자주관리경영 체제를 확립해 성공함으로써 새로운 기업경영의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그는 “현재 20개 지역사업부에서 본지와 별도로 지방판을 내고 있는데 총부수가 50만부”라고 소개하면서 지역신문의 모범을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내놓기도 했다. <내일신문>은 최근 외국담배 불매운동 등의 소비자운동, 여성문화센터 설립 등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내일신문>을 교두보로 한 ‘사회운동’으로 비중이 옮겨가고 있는 느낌이다.


자본영세성-달라진 이념에 곤혹

자본의 ‘민중성’이 ‘영세성’으로 바뀌어버린 언론시장의 높은 진입장벽도 이들의 발걸음을 묶고 있다. 시사잡지 시장이 월간지에서 주간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변화 속도도 월간지로만 버티기 힘들만큼 빨라졌다. 월간지 중심인 진보매체의 생존공간은 그만큼 좁아졌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공세적’으로 뚫고 나갈 수 있는 자본의 뒷받침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처음부터 주간으로 창간한 <내일신문>도 일간지나 기업의 ‘든든한 힘’을 바탕으로 시사주간지를 내고 있는 <뉴스플러스>나 <시사저널>등과의 경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상은 하늘에 닿아있지만 실제 하는 일은 부도직전의 중소기업 사장 역할을 할 때가 많다”는 <사회평론 길> 윤철호 편집국장의 말은 진보매체가 당면한 ‘돈문제’의 어려움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말>지도 한때 주간지 창간을 계획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나오면 “연간광고를 반으로 줄이겠다”는 위협을 받는 것은 기존매체와 다르지 않다. 어느 기업의 경우는 이들 매체에 광고를 주었다가 정보기관으로부터 “광고를 준 이유가 무엇이냐”는 조사 아닌 조사를 받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기사와 광고를 ‘거래’할 수 없는게 이들 매체의 ‘숙명’이다. 자본주의적 언론시장 구조속에서 진보매체가 갖는 한계를 이들은 요즘 온몸으로 절감하고 있다.

90년대를 설명하는 말과 논리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같은 다양한 논리의 밑바닥에는 ‘개인의 발견’이라는 공통분모가 놓여있다. 월간 <말> <사회평론 길> <내일신문>등 한국 진보언론의 맥을 잇고 있는 매체들은 이런 시대적 흐름에 맞춰 ‘인간탐구’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보였다. 문화현상에 대한 추적,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에서 시대정신의 큰 흐름을 읽어내려는 특집과 기획이 많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집단과 조직속에 존재하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개인의 삶을 둘러싼 역사와 사회로 발상법이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그 차이가 언젠가 하나의 물줄기로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진보매체 위기, 누구의 책임인가

진보매체가 안고 있는 고민은 크고 무거웠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상황에서 그 고민을 이들이 모두 떠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독자와 부수가 떨어지는 몇가지 ‘작은 현상’들을 놓고 이들에게 “뭔가를 내놓으라”며 화살을 돌리는 것 역시 그리 올바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보수 일색의 언론구조에서 기존매체가 보인 권력비판등 몇가지 현상적인 변화에 박수를 보내며 안주한 많은 사람들의 ‘편리한 사고’도 이들의 힘겨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들의 고민과 모색에 대한 더 많은 사람들의 진지한 동참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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