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잠수함이 발견됐으니 당장 강릉으로 출발해.”

18일 아침 시경캡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넘어왔다. ‘웬 북한 잠수함?’ 감이 쉽게 오지 않았다. 평소 북한의 대남도발 운운하는 보도를 ‘담백’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못된’ 선입견 때문인지 약간의 저항감을 안고 취재길에 올랐다.

도착해서 본 강릉은 말그대로 전시상황이었다. 공비수색에 나선 군헬기가 쏜 조명탄 수십발이 강릉시내를 훤히 밝히는가 하면 읍규모에 불과한 시가지를 벗어나면 곧바로 M60 공영화기, K2소총 등을 든 아군이 길목마다 8~9명씩 무리지은 채 삼엄한 경계망을 펼쳐 ‘이곳이 전장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통행금지 첫날인 18일밤에는 시내가 칠흙으로 변한 상태에서 통금계도차량과 군작전차량, 취재차량만이 뻥뚫린 도로를 쏘다녔다. ‘잠수함과 20여명의 공비’라는 규모가 갖는 두려움, 그에서 비롯된 유·무형의 통제와 긴장은 예상보다 컸다. ‘북한도발’이라는 표현이 질감있게 다가오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질감만큼 취재과정에서 느끼는 의문점도 적지 않았다.

18일 오후 11명의 공비시신이 집단발견됐다는 군경수색본부의 발표가 있은뒤 곧바로 청학산 정상에 올랐다. 산정부근의 쌍무덤가 한켠에 가지런히 누운채로 발견된 시신을 보자 두려움과 의구심, 연민 등이 한꺼번에 뒤섞여 착잡했다. 광신도 집단자살의 한 장면을 보는 것같은 오싹함이 느껴졌지만 발표대로 집단자살인가에 대한 의문이 뒤이어 스쳐갔다.

10명을 죽이고 자살한 듯 반대방향으로 쓰러져 있는 해상처장의 허리춤에 찬 권총케이스에 권총이 들어있는 점이 의혹을 증폭시켰다. 국방부는 사인을 잔당에 의한 타살로 추정된다고 하루만에 정정했지만 의문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둘째날 공비 3명이 사살된 단경골계곡 현장공개도 마찬가지였다. 3구의 사체중 2구는 마치 서로 끌어안고 서있다 총을 맞은양 포개진채 쓰러져 있었다. ‘도주나 저항중 사살됐다면 서로 흩어져 쓰러져 있어야 할텐데…’ 이들의 주검형태는 상식에 비춰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의 공비들은 ‘살인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론 아군의 사상자가 발생한 뒤부터 이런 느낌은 사라졌지만…. 9월인데도 썰렁함을 느끼게 하는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사살된 공비들의 사체와 이들이 식량으로 쓰기 위해 따놓은 머루·다래, 도토리 등에 몇 해 전 어느 책에선가 본 ‘맞아죽고 얼어죽고 굶어죽는다’는 빨치산의 운명에 관한 귀절이 왠지 모르게 오버랩됐다.

적개심보다 “안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22일 사살된 함장의 얼굴은 마치 ‘다 이루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어 취재기간 내내 머리에서 맴돌기도 했다.

군당국의 정보통제는 평시에도 그랬지만 전시에도 ‘악명’을 떨쳤다. 경찰정보가 군당국에서는 몇시간씩 확인이 지연됐다. 간첩 이광수에 대한 정보는 철저히 통제됐다. 그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급박한 교전상황, 현장접근과 정보의 통제 등 여러가지 악조건속에서도 6·25이래 가감없이 공개된 교전현장을 처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취재가 가져다준 수확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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