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말의 폭력, 말의 난도질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그 가운데서도 뻔질나게 등장하는 낱말이 ‘좌익’이며 ‘용공’이며 ‘친북’이다. 모두가 분단시대를 살아오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낱말들이다. 따라서 그 말뜻을 헤아리기 어렵다면, 숙맥이라기보다는 그 낱말들 아래 으레 따라붙는 ‘세력’으로 몰리기 십상일 터이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역시 정확한 말뜻을 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갈 때는 오른쪽이더니 올 때는 왼쪽이더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 낱말들이 갖는 상대성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것이 사람들의 머리속에 담긴 생각의 흐름을 상대적으로 거르는 말이라면 또 모른다. 그러나 요즘 춤을 추어대는 낱말들은 적어도 그쯤의 뜻으로 쓰여지는게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단순히 생각의 흐름을 가르는 말이라면 ‘좌익’과 ‘용공’과 ‘친북’이 싹쓸이 되어야 할 범죄집단으로 난도질 당해야 할 턱은 없다. 더구나 난도질의 선수들은 언필칭 자유민주주의를 말하고 법치주의를 강조한다.

도무지 해괴하다. 나는 이땅에 진정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정착됐는가를 묻고자하지 않는다. 정작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싹마저 무참히 유린될때, 그들은 무엇을 했던가도 구태여 묻고자하지 않는다.

오로지 묻고자 하는 건 이런게 그들이 떠받드는 자유민주주의이며 법치주의인가의 물음일 뿐이다. 물론 폭력은 ‘좌익’과 ‘용공’과 ‘친북’만이 아니라, ‘우익’과 ‘반공’과 ‘친남’ 역시 단죄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남의 머리속에 담긴 생각을 제멋대로 좌우로 가르고 예비음모 미수의 행적도 없는 사람들마저 싹쓸이 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는 참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도 아니며 법치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반자유민주주의며 반법치주의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반체제’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평등을 말하면 ‘좌익’인가.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말하면 ‘용공’인가. 통일을 말하고 쌀을 들먹이면 ‘친북’인가. 참고 삼아 한가지 사실만을 덧붙여두고자 한다. ‘문민’을 강조해마지 않는 오늘의 대통령도 일찍이 국가보안법의 개폐를 역설하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오늘의 언론읽기는 혼란스럽다. 오죽하면 <신문 읽는 법>이라는 책이 나와야 하는 세상일까만은 아무래도 그쯤으로는 모자라다는 생각이다. ‘정치용어 사전’ 또는 ‘시사용어 사전’에 싹쓸이 되어야 할 ‘좌익’과 ‘용공’과 ‘친북’의 정의를 분명히 밝혀주기를 제안하고 싶다. 그리고 오늘을 주름잡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정의도 정확히 밝혀줄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런 때 떠오르는 건 이제는 교육부장관이 된 지난날의 안병영 교수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와 반론이 거세었던 무렵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변론>을 펴냈으며, 자본주의의 승리가 일반적으로 회자되던 무렵엔 오히려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펴냈던 사람이다.

나는 아직도 그가 “우리는 제모습의 자유민주주의를 실험해보지도 못했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실험이 시작되었다고 보는지, 또는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판단하는지도 알고 싶다. 그리고 ‘과잉내면화된 분단의식’의 병폐가 이제는 사라졌다고 평가하는지도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정작 알고 싶은 건 이른바 이번 한총련사태에 대한 그의 진솔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는 1980년대의 이른바 건국대 농성사태에 대해서 경청할만한 글월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활자로 남아있는 그의 글월은 이렇게 매듭지어진다.

“아직도 우리는 그들을 귀정(歸正)시킬 희망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작전’으로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다. 이들의 회심(回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땅에 내일의 희망을 심을 수 있는 정치가 하루 빨리 펼쳐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그의 생각은 달라졌는가. 행여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에겐 너무 힘겨운 주문일지 모르지만, 다시 자유민주주의의 ‘교수’역을 자청할 수는 없는가. 그리하여 이땅의 정부와 정치와 언론을 일깨워 줄 수는 없는가. 이런게 자유민주주의인가라는 물음에 명쾌한 답변을 들려줄 수는 없는가.

역시 답답하다 못해 쏟아놓는 푸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예감을 뿌리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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