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주재 최덕근 영사의 피살사건에 대한 언론보도가 불확실한 추측기사를 양산하는 한편 선정적인 보도 태도로 일관, 간첩 사건으로 인해 조성된 경색국면을 더욱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언론은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북한을 지목, 이를 뒷받침하는 데 보도의 초점을 두고 의도적인 접근을 하고 있어 언론보도의 기본인 객관성마저 상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 신문들이 북한의 보복위협을 강조하는 등 이번 사건을 북한과 관련시키려는 의도를 보였는데 기사 제목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들 기사의 제목은 대부분 확인되지 않았거나 불확실한 취재원을 근거로 한 것이어서 북한 관련 보도의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추측보도’ 관행을 또다시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조선일보는 10월 4일 “수법치밀...북 소행가능성”이라는 기사제목으로 사건 시작부터 북한의 ‘보복선언’과 최영사 피살을 연결시키고 있다. 같은 날 동아도 “혐의자로 북한인 지목”이라는 1면 머릿기사를 실었는데 정보의 대부분이 ‘관계자’ 등 불확실한 출처와 외신에 의존한 것이었다. 중앙일보 역시 최영사 피살 사건을 보도하면서 북한인 집단 거주지역 동정을 언급하는 등 북한의 연루 여부에 관심을 집중했다. 4일 동아일보의 “작년 ‘선교사 피살’도 북 소행”이라는 기사 제목 역시 95년 일어난 선교사 살인사건이 북한의 범행인 것으로 단정하고 있으나 실제 기사 내용은 북한 개입에 대한 강한 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이다.

뿐만 아니라 10월 7일 “최영사 극비 첩보메모 남겼다” “북공작원 마약밀매혐의 기록” “북, 정보지키려 살해 가능성” 등 기사는 최영사가 북한 관련 공작 계획을 수립중이었으며 이로 인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민간 업무를 담당하는 영사가 공작 활동을 펼쳤다는 데 대한 파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이를 기정사실화한 것은 신중하지 못한 보도라는 지적이다.

반면 최영사 피살이 북한의 보복이라는 단정을 전제로 하지 않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접근한 기사는 4일자 경향의 “탈북자 범행 관련 있을까” 정도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살해된 사람이 외교관이라는 점에 비추어 거론될 수 있는 외교적 문제나 수사 협조 등 사건 해결을 위한 진지한 접근이 미흡하다는 평가다.

한편 6일자 중앙일보의 “최영사 피살 하루전 북, 테러 ‘보복’위협”을 비롯, 대부분 신문들이 최영사 피살전 북의 보복위협이 있었다는 기사를 실었는데 이는 사실과 어긋난 보도라는 지적이다. 신문보도와는 달리 최영사가 살해당한 것은 북의 보복발언이 있기 하루 전인 10월 1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적 차이가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거나 이번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흥미위주의 기사를 함께 다루는 등 선정적인 보도 태도도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4일 동아는 “북 신종독극물 개발-체내투입 2시간 뒤 흔적사라져”라는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는가 하면 “사건 나흘째 아직도 핏자국 선명” “최영사 살해 예행연습 흔적” 등 선정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한편 무장간첩 사건에 이어 최영사 피살 사건에 대한 언론의 과열 보도는 단순히 객관성 상실이나 선정적 보도라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있다. 한총련사태 이후 조성된 공안정국 아래 대북 위기 의식이 강조되면서 국내 현안들이 국민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최악의 무역적자를 비롯한 경제위기, 부정선거사범에 대한 처리문제, 미온적 역사바로세우기, 국정감사 등 간첩사건 못지않은 중요한 국내 문제에 대한 보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는 확대 과장된 언론의 대북보도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었던 과거의 불행한 경험을 갖고 있다. 더욱이 한총련 사건 후 조성되고 있는 공안정국에서 언론의 대북보도는 어느때보다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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