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경부터 시작된 센세이션만 놓고 보자면 2007년 가을 현재 TV 드라마계 최고의 화제작은 MBC 수목 드라마 <태왕사신기>여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방영 개시 후 두 달 가까이 지난 지금,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20%대 중후반을 오르내리는 시청률은 순항하되 폭발적이지 못하며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시청자들의 반응 또한 미지근한 상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정적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하다. 미스 캐스팅과 연기력 논란은 수시로 언론의 도마에 오르고 있으며, 드라마 애호가들이 인터넷 상에서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곳 중 하나인 '디시 인사이드'의 <태왕사신기> 갤러리는 비판과 비난의 글들로 넘쳐나고 있다. 해당 작품의 열혈 팬들이 자신들의 애정을 한껏 토로하는 곳이 디시 인사이드의 드라마 갤러리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분명 이례적인 현상인 것이다.

사실 <태왕사신기>는 여러 모로 비판의 여지를 많이 안고 있는 작품이다. 엄연히 사료가 존재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에 판타지의 세계를 무리하게 이식한 설정에서부터, 도무지 아귀가 맞지 않는 세계관(동서남북의 사신과 단군신화 중 풍백, 우사, 운사의 동일시), 그리고 '민족'을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양식적으로는 서구 판타지물의 스타일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태왕사신기>는 기존 사극 팬과 할리우드산 사극이나 판타지물, SF물의 팬 모두에게서 조소를 사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태왕사신기>를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과 같은 '고구려 영웅 서사'의 연장선상에서 놓고 본다면 우리는 작은 차별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영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라는 점에서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이를테면 지난 10월25일에 방영된 <태왕사신기> 제13화 중 한 장면은 그 단서가 될 듯하다. 백제 침공을 감행하기로 한 태자 담덕(배용준 분)은 군사들을 모으던 중 말갈족 용병 부대의 수장 주무치(박성웅 분)로부터 어렵사리 협력의 약조를 얻는다. 하지만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느냐며 반발하는 말갈 용병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담덕은 주무치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너, 여기 족장 아니지?"

   
   
 
극의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한 개그 컷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 수도 있는 이 장면은, 그 중심인물이 누구냐는 것과 그 시점이 언제냐는 것에서 확연하게 다른 의미를 낳을 수 있다. 그러니까, 굳이 감초 역할의 캐릭터가 아닌 주인공도 '농담'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영웅서사에서 그것은 단지 극 초반에만 허용된다. 철이 없는 반면 여유로운 품성을 지니고 있었던 대다수의 사극 영웅들은 특별한 계기를 거치면서 영웅으로 각성한다. 이후 그들은 내내 진중한 모습을 잃지 않으며 표정은 시종일관 결연해진다. 물론 농담 따위는 하지 않고, 해서도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를 스스로 형성한다.

<태왕사신기>의 담덕 또한 그 '특별한 계기'를 거친 바 있다. 내란의 화염 속에서 맞은 아버지 양왕(독고영재 분)의 죽음과 연인 기하(문소리 분)에 의해 심장이 검에 꿰뚫리는 경험을 통해 담덕은 쥬신의 왕이 될 채비를 마쳤다. 이후 왕의 자리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담덕은 분명 진중해졌으나, 사적인 영역에서의 담덕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그는 여유롭고 장난기 또한 왕성하게 살아 있다.

알다시피 어지간한 인간사의 풍상을 겪는다 해도 사람의 성격이란 쉬이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태왕사신기>의 주인공, 담덕의 현재상이란 지극히 당연한 묘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찍이 <주몽>이나 <연개소문>, <대조영>에서는 그 당연함마저 온전하게 표현된 바가 없다. 각성과 함께 그 모든 주인공들은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영웅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나아가, 만약 영웅 사극의 작가들이 다소 풍성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던 유소년기의 입체적인 인물을 단지 각성 후 비장해질 영웅의 모습과 대비시키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적으로 활용해 왔다면 그것은 스스로 빈약한 극작술의 한계를 토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 도처에서 지나치게 많은 영웅이 등장하는 것도 시청자들에게 있어서는 분명 현기증 나는 일일 터이지만, 그 영웅들이 심지어 뻔할 지경으로 평면적이기까지 하다면 문화적 소화불량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일 아닌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태왕사신기>는 많은 비판의 여지들을 가지고 있으며, 영웅 서사의 측면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분야별로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신을 곁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의 결정적인 기회들은 오직 담덕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주인공은 완벽해야 한다'는 이 같은 먼치킨(munchkin)적 캐릭터만 놓고 볼 때 기존의 고구려 사극과 차별을 꾀하려는 <태왕사신기>의 갈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허나, 적어도 마침내 땅에 발을 딛고 사람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태왕사신기> 속 신선한 영웅상은 주시의 가치를 남긴다.

■ 지은이는 부산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1992~1999), 딴지일보 대중음악팀장(2001~2003년), 씨네21 사업기획부 과장(2003~2004년), 블로그미디어 미디어몹 수석에디터(2004~2005년), 드라마비평웹진 드라마몹 수석에디터(2005~2006년)를 거쳐 2006년부터 드라마비평지 드라마틱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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