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史劇) 열풍이 심상치 않다. 고구려 건국기를 다룬 <주몽>의 뒤를 이어 발해 건국기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은 KBS 1TV 대하사극 <대조영>의 기세가 당분간 꺾이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그리고 지난 8월27일 첫 방송을 시작한 SBS 대하드라마 <왕과 나>(김재형 PD)도 무서운 기세로 월화드라마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게다가 오는 10일과 17일 각각 첫 방송을 앞둔 MBC 미니시리즈 <태왕사신기>와 MBC 창사46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이산-정조대왕>(이병훈 PD)에 대한 관심도 무척 뜨겁다. 여기에 이미 방송을 시작한 KBS 2TV의 <사육신>까지 포함하면 일주일 내내 사극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과거의 사극은 각 방송사마다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KBS가 역사적 사실 고증에 충실한 대하사극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면, MBC는 민중의 삶에 주목한 생활사 중심과 현대적 감각의 퓨전사극을 선도해왔다. 그리고 SBS는 KBS와 MBC 사이에서 왕조 중심의 역사에 치중하면서도 정사(正史)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 중심의 사극으로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사극은 방송사와 연출자의 색깔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용의 눈물>과 <여인천하>의 김재형 PD는 기존의 굵직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섬세하고 감각적인 연출 스타일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허준>과 <대장금>의 이병훈 PD는 일상의 소소함에 주목하면서 생활사극을 개척했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정조대왕의 군왕으로서의 면모와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선 굵게 그리겠다고 선언했다. 사극의 대가로 손꼽히는 김재형 PD와 이병훈 PD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재해석하면서 연출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줄지 지켜볼 일이다.

이 같은 변화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다. 사극은 오래 전부터 시청자의 사랑을 받으면서 평균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한 장르이다. 승자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역사를 작가의 상상력에 근거하여 새롭게 재해석한 사극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살이가 힘겹고 추레한 일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때마다 사람들은 평온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러나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대체할만한 그 무엇을 만들어낸다.

사극은 이와 같은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적합한 드라마 양식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정치 현실이 급변하는 시기에 사극이 시청자의 특별한 관심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열풍(熱風)’이라는 말 그대로 최근 강력하게 불고 있는 사극에 대한 ‘뜨거운 바람’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무리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정치의 계절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사극 열풍은 어쩐지 눈을 찌푸리게 하는 황사가 뒤섞인 듯해서 찜찜하다.

2006년부터 시청자의 관심 영역에 머물렀던 사극의 주인공들이 ‘영웅’ 일색이어서 그렇다. <주몽>의 ‘주몽’과 <대조영>의 ‘대조영’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를 건국한 민족의 영웅들이다. 10일 방송을 앞둔 <태왕사신기> 역시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영웅 ‘광개토대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극이다. 자고로 영웅은 난세(亂世)에 나타난다는데, 영웅들의 일대기를 다룬 사극이 이목을 사로잡는 지금이 난세란 말인가?

지금으로서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영웅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극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방송을 시작하거나 방송 예정인 <왕과 나>와 <이산-정조대왕>은 강력한 왕권이 위협당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극이다.

<왕과 나>는 사랑 때문에 남자이기를 포기하고 내시가 된 김처선을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이산-정조대왕>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암살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괴로움에 시달린 ‘정조대왕’이 아닌 인간 ‘이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처럼 절대 권력의 영웅 이야기와 절대 권력을 위협하는 반영웅 이야기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 현실, 혹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떠올리는 것은 과연 지나친 비약일까?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느라 지친 대중들이 갈망하는 ‘경제대통령’이 절대 권력의 영웅일지, 아니면 해체된 절대 권력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생활의 달인’일지 좀 더 두고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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