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과 민주주의

병원에다 민주주의를 갖다 붙인 것은 낯설어 보인다. 병원에 한 맺힌 일이라도 있었던 것인가라는 질문도 가능하겠다. 병원을 즐겨 연구하다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인지를 물은 것도 가능하겠고. 일본의 병원관련 한 기사를 보고 그냥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뿐이고 앞으로 그런 연구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의 소통을 화두로 삼아 보았다. 민주주의와 병원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고, 그 둘 간의 관계 해결은 우리 일상의 풍요로움과도 관련되어 있다. 결코 낯선 것이 아닌 반드시 걸고 넘어져야 하고, 씨름을 해야 할, 낯 익어져야 할 주제다.

킨 사마 / 킨 상 간 차이

일본의 교토대학 병원에서는 지난 해부터 환자를 부르는 방법을 바꾸었다고 한다. 김아무개 님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일본식으로 하면 킨 사마) 김아무개씨 (일본식으로 하면 킨 상)로 바꿔 부르리로 했단다. 두 가지 이유였다고 한다. 첫째는 환자들이 “님(사마)”이라는 극 존칭에 매우 불편해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극 존칭 이후로 환자들이 의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점을 들었다. 의사의 권위 감소로 인한 환자 관리의 어려움이 생겼다는 것이다. 둘 다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 기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병원에서 호칭 문제 하나를 놓고 치료의 효율성과 관련을 짓는구나를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한 한국 내에서의 소홀을 한번 점검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MBC 드라마 '하얀거탑' ⓒMBC  
 
사실 병원에서 의사들이 적어내는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가관인 것들이 많다. 그냥 한글로 적어도 될 내용을 영어로 적어 둔 것들을 꼼꼼히 읽어볼 기회가 있었다. 대부분의 전문 용어들은 사전을 찾아야 할 만큼 어려운 것들이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대부분의 경우 스펠링이 틀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냥 우리말로 하면 더 알아듣기 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왜 그들이 영어로 적기를 원하는지, 그것도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휘갈겨 쓰는지를. 간호사가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고, 간호사도 덩달아 그 내용을 반복함으로써 환자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고, 그래서 권위를 유지하고, 그리고 권력관계가 작동하도록 하고....

병원 경험을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다. 늦둥이 딸을 출산할 즈음이다. 산부인과 의사는 두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차트를 읽는 순간의 얼굴과 환자와 마주하는 순간의 얼굴, 이런 식으로 두 개의 얼굴을 연출했다. 고개를 들 때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표정을 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면 곧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다시 웃는 얼굴. 아마 웃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의사일 수도 있겠고, 병원의 방침에 철저하려 하는 자세일 수도 있겠고. 어쨌든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물론 환자이던 아내도 마찬가지 느낌을 토로했다.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자연스러운 것이 더 낫다. 그러면 그 의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의사도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컨설팅을 받아야 한다. 환자를 기쁘게 대하는 법, 환자와 소통하는 법을.

자연스러운 소통을

또 다른 경험. 늦둥이 딸은 뼈가 약해 보인다. 그래서 한번은 큰 수술을 받았고, 다른 한번은 기브스로 대강 치료를 했던 적이 있다. 앞의 수술의 경우와 뒤의 기브스의 경우는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있다. 그런데 그 시차를 두고 차트를 보는 법이 바뀌었다. 예전 종이 차트를 보던 데서 컴퓨터 화면으로 차트를 읽는 것으로 바뀌었다. 병원의 효율성을 위해서 도입된 자동화 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자동화되면 의사와 환자가 그 효율성에 힘입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자동화, 컴퓨터 차트 읽기는 과거보다 더 나쁜 소통의 방식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을 보느라 환자와 눈 맞춤을 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대화 시간은 과거보다 짧았으면 짧았지 더 충분하지가 않았다. 병원의 경영 효율성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소통에는 도움이 되질 않았다. 의사에게도 더 많은 환자가 돌아갈 개연성이 높은 자동화이고, 컴퓨터화였다. 이 또한 병원이 더 나은 소통을 위해 컨설팅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과연 몇 분이 적당하고, 컴퓨터 화면을 놓고 소통하는 적당한 방법은 무엇인지를.

환자와 의사 사이에는 갈수록 인간적 접촉을 차단하는 기계가 불어난다. 의사의 손 끝으로 알아보던 많은 것들이 초음파 기기 등으로 대체되었다. 의사는 환자의 속을 기계가 찍은 내용들을 통해 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예전만큼 환자들의 속 마음을 읽는 일은 잘 해내지 못하는 듯하다. 주위의 어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더 의사다. 병원만 다녀오시면 의사들 욕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프지도 않는 곳을 이상있다면서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고 한다며 불평이다. 자신의 병을 자신이 더 잘 아니 앞으론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병원이 무서운 탓이다. 병원에 정을 붙이지 못하는 탓이다. 그 어느 때보다 이상부위를 정확하게 잡아내는 기기들이 있으니 이상한 곳이 없을 수 없을 정도로 병원은 힘이 세졌다. 그러니 병원의 힘 앞에 모두들 무력해지지만 나이든 이들이야 그것을 이겨보려 억지를 부린다. 하지만 나는 그 억지가 싫지만은 않다. 여전히 병원이 위압적이고, 덜 친절하고, 덜 인간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것에 대한 불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구 의사, 이웃 의사

   
  ▲ MBC 드라마 '하얀거탑' ⓒMBC  
 
병원에 관한 한 일본과 한국은 차이가 많은 듯하다. 일본의 대부분의 동네 클리닉들은 가정집과 함께 있다. 의사가 자신의 집에 점포를 내는 식이다. 길가의 찻집처럼 버티고 있다. 한국의 병원들이 이층 이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수원의 남문 쪽에 1층 치과가 하나 있는데 그게 너무 신기해서 일부러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치과 의사 선생은 일부러 일본식으로 1층을 고집하는데 그건 친근감을 주기 위함이라고 말해 주었다). 어떤 병원은 안의 대기 의자가 모자란 탓에 길가에까지 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아픈 사람이 많다기 보다는 병원을 친근하게 여기는 탓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병원이 전혀 낯선 공간이 아니고 의사가 사는 집의 연장이 되다 보니 전혀 낯설음을 연출하는 곳보다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생각이 미쳤다.

얼마 전에 소개 받은 의사 부부가 있다. 둘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 3세인데 남편인 고씨는 치과 의사이고, 부인인 이씨는 호흡기 전문의다. 고씨는 집에서 생선 굽는 것이 취미이고, 이씨는 고양이와 놀기가 취미란다. 둘의 공통된 취미는 한국과 북한 배우고, 봉사하기다. 둘다 부모의 고향이 제주인 관계로 4.3도 잘 알고, 조선학교를 나온 총련계인 관계로 평양에 의료 봉사도 자주 다닌다.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 한국과 북한(그들 식으로는 북조선)을 공부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공부하는 것에도 관심이 있고, 집에 초대도 받고, 생선도 구워먹고, 그러고 놀았다. 그러던 차에 아들의 이가 부러져 고씨에게 치료를 받았다. 고씨를 소개 받은 다음날 이가 부러졌으니 참 세상에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 일이 다 있나 싶다. 고씨는 조선학교를 나왔지만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아들에게 물었더니 간호사가 한국말을 잘 해 치료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고씨는 한국인, 조선인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의사로 이름이 나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찾는 한국인, 조선인을 위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간호사를 채용하고 있었다. 소통을 위해서 말이다.

호흡기 의사인 부인 이씨는 교토대학 병원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항상 환자와의 첫 만남에서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힌다고 한다. 자신은 조선인이지만 일본말을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고, 자신의 경력이 어떠어떠하다고 일러주고 만약 그로 인해 의사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된다고 말해준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환자와 의사간 신뢰를 쌓을 수 있고, 자신도 자신감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숨기지 않겠다는 발로이고, 환자와의 관계에서 단순히 의사-환자가 아닌 사회인-사회인의 관계로 이어가겠다는 발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 생각해보아야할 과제를 이씨는 나에게 전해준 셈이다. 환자에게 의사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것이 신뢰를 쌓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어느 정도의 신비감은 있어야 소통이 더 원활한 것은 아닌지 등등, 구체적인 소통의 기술에 대해 연구해보도록 힌트를 준셈이다. 

병원과 민주주의

사회가 형식적으로나마 민주화가 이뤄지고 난 다음 힘 있는 기관들의 순위가 많이 바뀌었다. 그 무섭다던 안기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많지 않다. 청와대 쯤은 이젠 우습게 안다. 하지만 병원은 아니다. 병원은 두려운 곳, 무서운 곳, 말 듣지 않으면 손해나는 곳. 권력 순위 1위, 2위 안에 드는 곳이다. 의사 선생님들 좋아하실 이유 하나 없다. 그만큼 비민주적인 곳이란 말이다. 옛날 중앙정보부나, 청와대나, 남영동 대공 분실 같은 곳이란 얘기니. 보질 못했으나 <하얀거탑>이 재밌던 이유도 그 같은 권력기관에서 벌어지는 암투를 들여다보는 재미 아니었을까 싶다. 이젠 안기부나 청와대 등에서는 그런 암투가 너무 드러나 보여 별로 재미가 없게 되었다. 꼭꼭 닫혀 있는 병원 안의 이야기는 그래서 관심을 끈다. 새로운 권력기관을 들여다보고, 그 권력기관의 권력 작동방식을 풀어보고, 피 권력자가 좀 더 맘 편하게 , 몸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볼 시점이 된 것 같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내 몸을 내 맡길 곳이 비민주적이라서야 어찌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문화를 전공한다는 자라 말할 수 있으랴. 그래서 병원에서의 환자 호출법 기사가 유난히도 재밌게 보였다. 

서강대 원용진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가 블로그 '원용진의 미디어 이야기'(http://airzine.egloos.com)에 올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원 교수는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