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소수파가 갖는 함의는 부정적이다. 이른바 ‘국가 총동원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권위주의 시절 그것은 삐딱한 불만세력의 다른 이름이었고 집단적 따돌림은 정당한 징치로 간주되었다. 그 징치의 노림수는 ‘도태’였다.

88년, 6월 항쟁의 흐름을 타고 언론사에 복직한 한 언론인은 1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소수파라고 자조했다. 그의 자조는 양적인 세 불리에서 오는 푸념이 아니었다. 10여년 동안 기꺼이 소외지대에 머물게 했던 자긍심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데 대한 가슴 아픈 토로였다.

“언론사로 되돌아 왔을 때 우리는 여러모로 덧칠돼 있었다. 부패 언론인으로, 무능 언론인으로, 또는 특정 정치인에 줄선 정치 언론인으로 포장돼 있었다. 80년의 살육은 어느새 신군부의 강변대로 언론계 정화로 분장되어 있었다.”

복직 후 처음 나간 출입처에서 이 언론인은 ‘새까만’ 후배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복직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쭛개월 됐습니다.”
“몇년차에 해직되셨죠?”
“쭛년차였습니다.”
“음, 그럼 나보다 언론 경력이 짧구만.”

5공 치하에서의 그늘졌지만 떳떳했던 삶은 이렇게 무시되었다. 사주에 의해, 동기생에 의해, 더 나아가 ‘새카만’ 후배들에 의해 해직 경력은 ‘5공 언론경력’에 견줄 수 없는 하찮은 것으로 폄하되었다.

해직 언론인의 모습을 부패하고 무능하며 정치지향적인 사람들로, 그래서 ‘해직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로 묘사한 분장사는 80년에 살아남은 ‘다수파’였다.

80년 MBC 경제부장을 지내다 해직당한 임동훈 씨의 회고담.

해직으로부터 8년여의 시간이 흐른 1988년 가을의 일이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함께 시국을 걱정하다가도 얼굴이 굳어지곤 하던 옛날의 동료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1980년대 내내 MBC의 요직을 두루 거쳐온 그가 나에게 묻는 말은 왜 새삼스럽게 해직 언론인들이 복직을 원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행여 기득권에 침해라도 받을까 전전긍긍해 하는 표정으로 덧붙이는 것이었다.
“들어와서 뭐 할려고 그래? 다시 뭘 할 수 있어?”

나는 망연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그는 그후에 약간의 부침을 겪었으나 기득권에 결코 손상을 받지 않았고 문민정부에서도 더 큰 요직을 맡았다.(<80년 5월의 민주언론> 중에서 발췌)

살아남은 ‘옛 동료’들의 기득권 사수는 여러 가지 양태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해직 언론인들은 원상회복이 아니라 재입사의 형식으로 복직되었다. 조선일보와 같이 아예 복직을 원천봉쇄한 언론사도 있었다.

복직 후 해직 언론인들은 또 다른 견제에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부패·무능의 꼬리표는 어느새 과격·편향의 꼬리표로 대체되었다. 정당한 의견개진엔 ‘삐딱한 사람’이란 토가 달렸고, 이같은 평가는 해직 언론인들의 입을 막는 무기로 십분 활용되었다.

해직된 지 2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해직 언론인들은 여전히 소수파로 남아있다. 집단적 따돌림도 계속되고 있고 대량 해직의 부당성과 해직 언론인들의 도덕적 우월성은 거세되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외부의 폭압적 권력에서 자사이기주의에 기반한 내부의 자발적 협력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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