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당시 역사적인 격려광고 운동이 벌어졌을 때 첫 참여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인 것으로 31년만에 밝혀졌다. 해당 격려광고는 75년 1월1일자 8면에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 명의로 실렸으며, 그 주인공의 신원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75년 당시 동아일보 광고국장이었던 김인호(84)씨는 3·17 동아사태 31주년을 앞두고 11일 미디어오늘 기자와 만나 "74년 12월30일자(석간·31일자는 휴간) 1면에 내 명의로 격려광고 모집 공고를 낸 뒤 과연 광고가 들어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31일 오전 10시께 한 사람이 '김대중 선생의 심부름'이라며 친필 광고 문안과 광고료를 갖고 와 내가 직접 이를 접수, 1975년 신년호에 게재했다"고 증언했다.

   
▲ 김인호 동아일보 전 광고국장 ⓒ이창길 기자
"격려광고 모집공고 나간 뒤 DJ 1착으로 접수…나중에 알고 보니 김옥두 비서"

김 전 국장은 "당시 이 광고를 누가 냈는지 알려지면 청와대에서 난리가 나고 광고 게재자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한 시민'이 누군지 알리지 않았다"며 "그날 광고를 가져 온 사람은 나중에 알고 보니 김옥두 비서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74년 도쿄 납치 사건 이후 가택 연금 상태였다. 고령의 김 전 국장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가) 이러한 경위를 마지막으로 털어놓을 자리인 것 같아 내가 겪었고 알고 있는 그대로 밝힌다"고 말했다.

   
▲ 역사적인 동아일보 격려광고 운동이 시작된 1975년 1월1일자 신년호의 8면. 원래 이 지면에는 GM코리아의 전면광고가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돌연 해약이 통고돼, 김대중 전 대통령의 광고(왼쪽 상단) 등 격려광고 3건과 동아일보 사가(社歌) 등으로 지면을 대체했다.
격려광고가 처음 실린 75년 신년특집호(본지 8면·간지 8면 발행)에는 △1면에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7(사회)면에 '신민당' 명의의 격려광고가 실렸고 △8면에 동아일보 사가(社歌)와 함께 '한국교회여성연합회' '경동교회 시민일동'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 광고가 전면에 걸쳐 실렸다. 원래 8면은 GM코리아가 전면광고를 내기로 했다가 갑자기 해약을 통고, 펑크가 난 상태였다. 또 4면에 '언론자유 수호격려'라는 제하에 총 23건의 1단 광고가 실렸다. 사전 제작한 신년특집 간지에는 격려광고가 아닌 일반광고가 실렸다.

   
▲ 동아일보 1975년 1월1일자 신년호 8면에 실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격려광고.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 명의로 실렸다.
김 전 국장은 이 가운데 '한 시민'의 광고를 제1호로 자신이 직접 접수했고, 이어 '교회여성연합회'과 '경동교회' 광고를 이부영 기자(전 열린우리당 의장)가 자신에게 전달했으며, 1면·7면 광고는 마감 직전에 받아 게재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언론의 자유를 지키자>라는 제목의 격려광고에서 "언론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그것 없이는 인권도 사회정의도 학원과 종교의 자유도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국가안보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나는 언론자유와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한 시민으로서 모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언론자유의 촛불을 지키기 위하여 이 광고문을 유료 게재한다"고 밝혔다.

김 전 국장은 당시 김 전 대통령의 광고와 관련해 "참 조리있게 잘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며 "격려광고 때 수많은 정치인이 동아일보를 격려하고 방문했지만, 직접 광고를 낸 사람은 김 대통령 외엔 기억이 안 난다"고 말했다. 당시 광고금액에 대해선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1000원짜리 100장 한 다발(10만원)이었던 것 같다"며 "당시로선 매우 큰 돈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옥두 전 의원 "동아일보 탄압 더 가혹해질 것 우려해 익명으로 게재"

김 전 대통령의 격려광고 게재에 대해서는 당시 총무비서였던 김옥두 전 의원의 기억도 일치했다. 김 전 의원은 13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75년 1월1일자 '한 시민' 광고는 내가 갖고 간 게 맞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당시 김 전 대통령은 (74년 납치 사건 이후) 가택 연금 상태였는데, 동아 광고 사태를 보고 '나도 어렵지만 동아일보를 살려야 한다'면서 직접 격려광고를 냈다"며 "주변에도 격려광고를 내도록 적극 권유하고 밤낮으로 동아일보 앞을 지키도록 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은 신년호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몇 차례 광고를 더 냈다"고 말했다.

왜 '한 시민' 명의로 광고를 냈느냐는 질문에 김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격려광고를 낸 것을 알면 동아일보에 대한 탄압이 더 가혹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년호 광고가 '제1호 격려광고'라는 것을 알았느냐는 질문에는 "처음 듣는다"고 답변했다. 31년전 탄압을 무릅쓰고 동아일보를 격려·지원했던 김 전 의원은 "지금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제까진 홍종인씨가 첫 격려광고 낸 것으로 알려져…김 전 국장 "사실 아냐"  

이제까지 언론계에서는 첫 동아일보 격려광고는 홍종인씨(1903∼1998)가 낸 것으로 알려져왔다. 무엇보다도 74년 12월30일자 1면 하단에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라는 글이 홍씨의 명의로 실렸기 때문이다. 또한 홍씨의 글 위쪽에 실린 김인호 전 국장의 돌출광고에 "…아래와 같은 개인 정당 사회단체의 의견 광고, 그리고 본보를 격려하는 협찬광고와 연하(年賀)광고를 전국적으로 모집하오니…"라고 씌여있다는 점도 근거로 꼽혀왔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필, 부사장, 회장 등을 역임한 홍씨는 당시 72세의 원로 언론인이었다.

   
▲ 동아일보 1974년12월30일자 1면 하단. 하단에 4단통 크기로 원로 언론인 홍종인씨의 <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가 실렸고, 그 위 왼쪽으로 김인호 전 광고국장의 격려광고 모집공고가 실렸다.

'자유언론: 동아투위 30년 발자취'(2005)도 "개인명의의 격려광고로는 74년12월30일자 1쪽에 실린 원로 언론인 홍종인의 의견광고가 첫 테이프를 끊었다"고 기록했다. 홍씨가 사망한 98년 6월에는 조선일보에 "1974년 12월 유신정권의 동아일보 광고탄압이 시작되자 맨 먼저 격려광고를 게재한 분이 선생이셨다"는 한 언론학자의 기고문이 실리기도 했다. 이 대목을 다룬 한국 언론사(言論史) 자료들은 모두 대동소이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 전 국장은 홍씨의 글을 '격려광고'로 볼 수는 없다는 의견을 밝혔다. "홍씨의 글도 동아일보를 살리자는 내용이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밝히자"는 것이다. 김 전 국장은 "홍씨의 글은 원래 편집국으로 들어온 칼럼인데, 편집국에서 무슨 이유인지 글을 게재하지 않기로 해 '그렇다면 나라도 싣겠다'고 1면 하단 광고 자리에 실은 것"이라며 "격려광고라면 광고국에 광고를 내달라고 의뢰하고 광고료를 내야 하는데, 홍씨의 글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아래와 같은…"이라는 표현이 홍씨의 글을 지칭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 표현은 광고 문안의 그 다음 구절을 가리켰을 뿐"이라며 "30일자에 처음으로 '비밀작전' 식으로 격려광고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냈는데 어떻게 동시에 격려광고가 실릴 수 있겠느냐. 모집광고가 난 것을 보고 격려광고를 의뢰한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1호"라고 거듭 강조했다.  

실제로 동아일보 75년 1월23일자에 실린 '본사 광고 담당자 좌담회'에는 "격려광고가 실리기 시작한 것은 75년 신년호부터였다. 모 회사(GM코리아)가 1일자 신문에 싣기로 했던 전면광고를 돌연 취소해버려 신문에 펑크를 낼 수도 없고 해서 격려광고를 실었던 것인데…"라고 전해 이를 뒷받침했다.   

격려광고 5개월간 1만352건 물밀 듯…세계 언론사에 '전대미문'   

   
▲ 동아일보 75년 1월14일자 4면 하단. 신년호부터 시작된 동아일보 격려광고가 각계각층에서 물밀듯이 쇄도하여 이 해 5월 중순 격려광고가 중단될 때까지 게재 건수가 1만건을 헤아렸다.
74년 말 박정희 유신정권은 동아일보 광고주를 압박, 동아일보 광고가 무더기로 해약·중단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며 이에 12월26일자부터는 급기야 백지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이에 김 전 국장은 12월27일자 3면 하단 광고란에 신문광고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동아일보 신문광고 PR'를 게재했으며, 12월30일자 1면에 격려광고를 모집하는 돌출광고를 자신의 명의로 실었다. 이후 동아일보 격려광고는 75년 1월에만 2943건, 5월 중순까지 1만352건이 실려 한국 언론사 뿐 아니라 세계 언론수용자 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 김인호 동아일보 전 광고국장이 광고사태 당시를 기술한 책을 들여다보며 증언을 하고 있다. ⓒ이창길 기자
김 전 국장은 1923년 평남 덕천 출생으로 1945년 말 동아일보가 복간된 직후인 1946년 광고국에 입사한 동아일보 역사의 산 증인이다. 김 전 국장은 6·25 참전과 군 복무, 한국일보 근무를 거쳐 1961년 동아일보에 복귀한 뒤 △동아방송(DBS) 업무부장(68∼72) △동아일보 광고국장(72∼77) △동아일보 사장실 기획위원(77∼80) △한국연합광고 영업담당이사(80∼82) △한국신문협회 광고협의회 사무국장(85∼98) 등을 역임했다.

김 전 국장은 동아일보 광고사태 당시 정권의 탄압과 사주의 소극적 태도 와중에서 '광고항거'를 주도했으며, 당시 육군 보안사에 끌려가는 고초도 겪었다. 지난 2001년에는 동아일보 광고사태 당시 공로 등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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