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예정됐던 조선일보의 이승복 작문 기사 논란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이 무기한 연기됐다.

서울지법 형사항소9부(부장판사 구만회)는 이날 조선일보의 1968년 12월11일자 <공비, 일가4명을 참살/”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찢어> 기사의 작문 의혹을 제기했던 김주언 전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과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에 대한 명예훼손 항소심 선고공판에 앞서 “판결을 내리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어 심리를 재개키로 했다”며 “오는 3월 2일 오전 10시 심리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재판부가 선고공판을 연기하고 심리를 재개함에 따라 그동안 김주언, 김종배씨측과 조선일보측이 팽팽히 맞서왔던 쟁점들을 통해 이승복 오보논란이 어디까지 재조명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법조계와 언론계 안팎에서는 재판부가 선고공판을 연기한 배경에 대해 1심 이후 그동안 10여차례 항소심 심리과정이 있었으며 양측이 증인·증거 채택 여부 등을 놓고 팽팽하게 맞섰음을 고려할 때 재판부가 이번 사건에 대해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니냐고 보고 있다.

‘이승복 작문기사’ 법정공방의 피고인측 변호를 맡고 있는 김형태 변호사는 항소심 선고공판이 연기된 배경에 대해 “내가 보기엔 조선일보가 현장취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인 것 같다. 현장취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따라서 조선일보 기사가 허위보도라는 피고측의 주장은 진실이거나 진실이 아니더라도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 맞는데 워낙 민감하고 상징적인 사건이라 재판부가 회피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변론요지서에서 △1968년 12월 당시 조선일보가 찍었다는 사진에 경향신문 기자들이 찍혀있는데 현장에는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없었다는 경향신문 기자들의 증언 △조선일보 보도에서 나타난 살해현장과 경위 등의 모순 △원고 조선일보가 제시한 사진들이 조선일보 기자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라는 점 △68년 당시 한국일보 강릉 주재기자였던 박주환씨의 증언 △조선일보 기자가 우체국을 두고 대관령 목장에서 전화로 기사를 송고했다는 정황상 문제점 등을 들어 피고인들은 무죄라고 밝혔다.

한편 피고인들에게 실형이 선고됐던 1심과 달리 항소심 심리공판에서는 그동안 제기됐던 쟁점 외에도 추가적인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언론계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알려졌던 이승복 기사 작문설에 대해 조선일보 내부에서도 ‘오보특종’이라는 말이 있었다는 진술도 나왔다.

조선일보 기자출신인 이모씨는 지난해 항소심 심리공판에서 당시 조선일보 내부에서조차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승복 기사를 대표적인 오보특종의 한 사례라는 말이 많았다고 주장했다. 70년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가 퇴사한 이씨는 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수습교육을 받던 기자초창기 때 비록 술자리에서이긴 하나 조선일보 선배들로부터 ‘오보특종이라는 것도 있다’ ‘실제로 현장에 가지도 않았다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수차례 있었다”며 “실제로 조선 기사가 작문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어도 이미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이승복 기사가) 작문 기사의 대표적 사례라는 분위기가 기자들 사이에서 공유돼온 것만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과장된 사실을 당시 군부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의 선전에 활용돼온 사례 중 하나라는 게 당시 기자들의 말이었다”며 “당시엔 엉터리, 작문 소설기사가 많았는데 이승복 기사의 경우엔 같은 신문사에서도 부정확한 기사로 꼽힐 정도의 내부 인식이 있었다는 게 내 증언의 요지였다”고 덧붙였다.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이 지난 92년 저널리즘에 조선일보의 이승복 작문기사 의혹을 제기하기 이전, 언론학계에서도 이승복 기사가 ‘오보’라는 의혹이 제기된 적도 있다.

한국언론연구원(현 한국언론재단)이 지난 90년 12월24일 펴낸 <오보와 정정>이라는 책을 쓴 고려대 김민환 교수(당시 전남대 신방과 교수)는 오보의 사례 5가지 중 하나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이승복 피살사건’을 들었다. 김 교수는 조선일보의 68년 12월11일 사회면 톱으로 실린 기사 전문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은 이 기사를 읽으면서 무서운 전율과 진한 감동을 아울러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며 “그러나 이 기사는 사건취재에 뒤늦게 참여한 기자가 상상력과 글솜씨로 최대한 동원하여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어 “날조한 사실이 이미 언론계에 공공연한 비밀이 돼있는 상황에서도 이승복은 아직도 반공이데올로기 선전의 훌륭한 재료로 이용되고 있다”며 “취재보도의 경향이 주관성의 개입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화한 상황에서 이런 날조기사는 앞으로도 알게 모르게 독자들을 기만할 개연성이 높아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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