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13일 정형근 의원 관련 공판에 증인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지난 99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보광 세무조사를 무마하려는 로비를 시도했다는 증언을 했다. 이종찬 전 원장은 이에 대한 본지와의 전화 통화 이후,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을 소상히 정리한 글을 자신의 홈페이지(www.jc21.or.kr )에 올렸다.

다음은 이 전 원장이 홈페이지에 띄운 글 전문이다.

<10월13일 법정에서 진술한 세부내용 밝힘>

 언론문건 사건에 대하여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이 보도된바 일부 내용에 대하여 오해가 있을 것 같아서 보다 상세하게 밝혀 둡니다.

1. 나는 2003년 10월13일 14:00 제309호 법정에 증인으로 나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음을 알립니다.

2. 나의 진술 내용:
- 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1999년 10월 말경 정형근 피고의 폭로행위가 아무런 근거가 없고, 전적으로 자기의 상상력으로 원고인 이강래의원과 증인인 저를 음해할 목적으로 작성한 각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정형근 피고는 1999년 10월 25일, 이강래 원고가 ‘성공적 개혁추진을 위한 외부환경 정비방안’이란 제목하에 언론사를 통제하기 위하여 세무사찰 등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라는 문건을 작성하였고, 본 증인 이 문건을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는 허위사실을 폭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건은 이강래의원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북경에 있는 중앙일보 문일현 기자가 작성한 것이고, 본인은 이 문건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도 또 보고하지도 않았으므로 이런 허위사실을 폭로하여 이강래 윈고와 본인의 명예를 훼손시킨 데 대하여 고발한 사건인 것입니다.

- 본인은 이미 검찰에 2차례의 임의 진술서를 보냈고 또 2차례 임의 출두하여 이 사건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문건이 이강래의원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북경에 있는 문일현기자의 작성 문건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이 문건이 본인이 읽기도전에 본인 사무실에서 증발되었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이 문건에 대하여 정형근 피고가 폭로한 이후에 기자를 통하여 사본을 입수하여 읽을 수 있었고, 북경에 있는 문기자에게 통화하고 나서야 그 문건은 문기자가 작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강래의원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 이른바 ‘성공적 개혁추진을 위한 외부환경 정비방안’이란 문건은 6월23일 본인 사무실로 팩스로 보내왔습니다. 그 날은 본인이 외부에 있었기 때문에 그 문건을 접수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라도 읽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증은 차치하고 중앙일보 문일현 기자가 본인에게 이 문건을 전송했다는 6월23일로부터 불과 9일밖에 되지 않은 7월2일 19:00시 중앙일보 당시 홍석현 사장이 본인을 롯데호텔 지하 일식당 벤케이로 초청하여 “내가 지금 세무사찰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통령 주변에서 나를 모함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정면대결을 하겠습니다.”라고 상당히 격앙된 말을 들었습니다. 본인은 우선 홍사장을 진정시킨 후 “지금 대통령께서 해외순방 중이므로 내일 즉시 김종필 총리에게 보고하여 사태를 수습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도 괜찮겠느냐”고 묻고 홍사장의 동의를 받은 후 수습활동에 나섰습니다.

1999년 7월3일 토요일이었습니다. 본인은 아침 일찍부터 김종필 총리에게 면담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총리께서 출타중이어서 연락이 안 되고, 오후 22:00시경 통화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즉시 관저로 찾아 가겠다고 하였더니 김총리께서 우선 전화로 말하고 필요하면 다음날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본인은 홍석현 사장을 만나서 들은 내용을 보고했습니다. 김총리는 다음날 즉시 알아보고 수습하겠다고 약속하기에 이 말을 홍사장에게 전달하여도 가하냐고 확인한 후 홍석현 사장에게 다음날 김총리와 통화한 내용을 전달했습니다.

-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만약 본인이 문일현 기자의 문건을 홍사장과 만났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언급하였을 것이고, 또 중앙일보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세무사찰이라는 강압수단에 본인이 동의하였다면 다음날 어떻게 김종필 총리에게 그 부당함을 보고하면서 사태 수습을 건의하였겠습니까?

- 이상의 내용으로 봐서 정형근 피고가 폭로한 내용은 허무맹랑한 것이고 분명히 본인과 이강래 의원의 명예를 훼손시킨 의도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이런 내용의 진술에 대하여 변호인으로 나온 홍준표 의원은 나에게 이렇게 질의했습니다.

- 이 원장이 청와대에 보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여하튼 결과적으로 언론사에 대한 세무사찰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로 미루어 설령 이원장이 보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정권의 핵심 누군가에 의하여 벌써 언론사에 대한 세무사찰을 한다는 방안이 강구되었고, 그 일환으로 이 문건이 등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4. 변호인의 질의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반론을 했습니다.
- 언론사 세무사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점으로 보면 이 문건이 나에게 전달되는 시점에 이미 중앙일보에 대한 세무사찰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보낸 이 문건으로 언론에 대한 강압수단이 착수되었다는 주장은 분명한 허구이고 악의적인 조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5. 재판장은 “증인은 정형근 의원의 처벌을 바랍니까?”라고 질의 했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 그동안 재판부에서 7월, 또 8월 두 차례에 걸쳐 증인을 나오라는 통보를 받고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번에도 여러 날을 두고 과연 출석해야 옳은지 스스로 반문하여 왔습니다. 본인은 원래 정치행위를 법정에서 다투는 일은 현명치 못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의정단상에서 정책을 놓고 서로 토론하고 협상하는 것이 정치 본래의 모습입니다. 이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정치인이 스스로의 무능함을 나타낸 행동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굳은 결심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정형근이라는 피고, 개인 때문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치가 점점 타락해 가고 저질화(低質化) 되어가는 데 다소라도 바로잡기 위해서 입니다. 지금 우리 정치는 국회의원의 원내발언이 면책된다는 헌법상의 권리를 정치인들이 마구 남용함으로써 숭고해야 할 의정단상이 품위를 잃고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연일 국회에서 근거도 없고, 상대에 대한 인신공격이 분명한 폭로, 선동행위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여야가 서로 정략적으로 계속 매일 ‘한건주의’식으로 폭로하고 후에 진실이 밝혀지면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저질 발언으로 우리 정치는 역사상 최악이라는 지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이러한 품위 없는 저질 발언 때문에 국민들은 정치를 혐오하게 되고 정치인들이라면 무작정 매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정치인 스스로가 자기 발등을 찍어서 얻어진 부메랑인 것입니다.

더욱이 법을 배웠고, 법을 집행했던 사람이 정치적 목적 때문에 법을 악용한다면 이 나라의 정치발전은 요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정치가 정상적인 상황으로 되돌아가고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존경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려면 이제는 이런 식의 폭로정치는 끝장내야 합니다. 그리고 의원 한사람 한사람이 그야말로 국민의 대의를 수임하는 헌법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충정 때문에 저는 비통스럽고 고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번 판결로 인하여 우리 정치발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6. 이상과 같이 진술을 하고 나오면서 마음은 가볍지 않았습니다. 이런 문제로 다시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여야가 모두 국가의 정책을 심도(深度)있게 토론하는 분위기가 하루 빨리 오게 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였습니다.

2003년 10월 14일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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