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일부 정치인들이 소환 과정에서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자 공개소환 여부를 두고 검찰과 기자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김용채 전의원-박주천 의원 몰래 출두 발단

검찰과 기자 간의 갑론을박은 현대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김용채 전 의원(22일 소환)과 박주천 의원(23일 소환)이 각각 기자들을 따돌리고 몰래 출두한 게 발단이 됐다.

당초 검찰은 이들을 공개소환하기로 하고 기자들에게 소환일정도 밝혔다. 그러나 김용채 전 의원은 지난 22일 예정출두 시간인 오후 2시에 검찰에 도착했으나 촬영 및 취재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을 보고 "기자들이 있어서 도저히 못들어 가겠다"고 검찰측에 통보했다. 반드시 신병을 확보해야 했던 검찰은 직원을 시켜 몰래 김 전 의원을 데려왔다.

대검 국민수 공보관은 "구속수사를 위해 신병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검찰에 출두까지 한 소환자가 언론 노출을 꺼려해 불가피하게 몰래 데려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23일 소환된 한나라당 박주천 의원은 아예 예정시간보다 일찍 출두하는 방법을 썼다. 박 의원은 당초 오전 10시까지 출두할 예정이었으나 1시간 반이나 일찍 출두해 기자들을 따돌렸다.

또 한나라당 임진출 의원의 경우 검찰이 소환일정을 공개하면 출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검찰은 임 의원 소환일정을 공개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언론기피증이 확산되고 검찰에 이에 부응하는 조처를 내리자 기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한나라당 박주천 의원의 경우를 전해들은 기자들은 "검찰이 박 의원을 빼돌렸다"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기자들은 대검 문효남 수사기획관에게 "앞으로도 이렇게 소환하는 관행이 굳어지는 거냐. 검찰이 이런 식으로 기자단과의 신사협정을 무시하면 앞으로 어떤 사고가 나도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마라. 지하주차장 1층 민원실 등 들어올 수 있는 구멍마다 '뻗치기' 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국민수 공보관은 "소환일정을 모두 언론에 공개했음에도 본인이 일찍 나오는 바람에 갔다가 다시 오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단 "소환날짜-시간공개는 국민 알권리"

기자들은 더 나아가 보다 근본적인 조처를 요구하고 있다. 기자단은 언론노출을 꺼리는 정치인이라도 소환일정 만큼은 예외없이 공개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인의 경우 피의사실은 제쳐두고라도 소환 날짜와 시간은 공개하는 게 국민 알권리 보장 차원에서 최소한의 조처라는 게 기자단의 주장이다. 한 대검 출입기자는 "알권리 차원에서 공인에 대해서만큼은 일정을 공개해야 한다"며 "단순히 수사편의를 위해 소환 대상 국회 의원의 입맛에 맞게 비공개 소환하는 것은 편법"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검찰측은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대검 국민수 공보관은 "그동안 국민적 관심이 높은 인물의 경우 개괄적인 피의사실과 이들의 소환일정 정도는 언론에 발표해왔으나 최근 들어 정치인들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 수사에 애를 먹고 있다"며 "국민의 알 권리와 사생활 보호(무죄추정의 원칙) 사이에서 합리적인 접점을 찾아 정치인의 소환일정 등의 공개여부를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검은 지난달부터 정치인의 피의사실과 소환일정에 대한 대외 공개가 법적으로 타당한 것인지를 두고 해외사례나 판례 등을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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