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신문이 11일자에서 한총련 합법화 '재검토' 또는 '유보'를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겨레신문과 한국일보 등을 제외한 대다수 신문은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미군 기지에 진입해 장갑차를 점거한 사건 이후 청와대와 정부 당국자가 한총련 합법화 '재검토' 방침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11일자 1면 <한총련 합법화 재검토> 기사에서 청와대의 문재인 민정수석이 "'한총련 합법화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한총련의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며 '한동안 한총련이 변화하는 듯 보이더니 저런 식으로 행동하면 합법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도 11일자 1면 <한총련 합법화 재검토>에서 "한총련의 최근 활동 및 성격을 종합적으로 점검해 이적성 여부와 합법화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을 재검토하기로 했다"며 9일 열린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에 참석한 정부 관계자의 말을 빌어 "정부차원의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대한매일도 같은 날짜 1면 <한총련 합법화 유보 시사>에서 "내부적으로 검토해오던 한총련 합법화 조치가 상당기간 유보될 것이라고 정부 당국자들이 전했다"며 한총련 소속 학생들의 시위는 "합법화에 대한 판단을 어렵게 만드는 사유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정부는 한총련 합법화 결정 주체 아니다"

이들 신문의 보도는 한결같이 청와대 고위 관계자나 정부 당국자의 '언급'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총련 합법화 재검토' 보도는 객관적인 '중계보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나 정부 당국자의 그런 언급이 부적절하다는 데 있다.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한 곳은 대법원이다. 한총련 강령에 연방제가 명시돼 있고,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볼 수 있거나 남한사회를 식민지로 규정하는 듯한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문제삼아 국가보안법상의 '이적성' 규정을 근거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판결한 것이다.

따라서 한총련을 합법화하기 위해서는 한총련 스스로 강령을 개정하지 않는 한,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는 다른 판결이 나와야 한다. 한총련 합법화 여부는 행정부가 아니라 사법부가 판단할 몫이라는 얘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김승교 변호사는 "한총련 합법화 여부의 핵심인 한총련의 이적성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곳은 법원"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청와대 등 정부 관계자가 합법화를 재검토하기로 했다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며, 정부(검찰)는 법원의 판례에 따라 수사와 기소를 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법무부 이춘성 공보관도 "합법화 재검토 여부에 대해 정부가 나서서 어떻게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법무부나 검찰을 통해 한총련 소속 대학생에 대한 수배를 해제하고, 불구속 수사하는 등의 조처를 취할 수는 있으나 이것은 한총련 합법화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그것은 단지 한총련 소속 대학생에 대해 불구속 처리할 건지, 구속 처리할 건지를 결정하는 순수 행정 조처일 뿐이지 한총련의 성격을 규정하는 조처는 아니다.

물론 정부가 한총련 합법화 조처에 관해 권한을 전혀 행사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 확정판결의 근거가 됐던 법률을 개정하는 작업에 나설 수 있다. 국가보안법의 해당 규정에 대한 개정안을 정부 발의로 국회에 제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정부가 결정 권한을 갖는 건 아니다. 다만 개정안을 제출할 뿐이지 그 결정은 국회에서 표결로 처리되는 것이다.

더구나, 국가보안법 개정의 당위를 한총련 소속 대학생의 미군 기지 진입 사건 때문에 부정하는 것은 참여정부의 국가보안법 개정 공언을 뒤집는 것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인 것이다.

'분위기 조성' 발언에 언론 춤춰

사정이 이러한데도 청와대와 정부 당국자들은 왜 이런 발언을 쏟아낸 것일까? 한 대검 출입기자는 "정부가 나서서 합법화 재검토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일종의 립서비스"라며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은 불법 과격 시위에 대한 분위기 조성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정부 당국자들이 3부의 권한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합법화 재검토' 발언을 쏟아낸 이유가 '분위기 조성용'이라면, 그리고 이런 사정을 언론이 익히 알고 있었다면 해당 보도 또한 비판 대상이 된다.

의도성이 강한 발언을 여과하지 않은 채 충실히 '중계'만 한 행위 자체가 일종의 '직무 유기'인 셈이다. 또, 정부 당국자의 '분위기 조성' 의도를 거들고 나선 '야합' 행위이기도 하다.

정부 못지 않게 언론 또한 '이 참에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도를 갖지 않는 한, 정부 당국자의 시시콜콜한 발언 하나하나에 시시비비를 걸던 이전의 보도태도를 접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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