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말과 사건 속에서 인권의 가치를 벼리기 위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들의 고민을 미디어오늘에 연재합니다. 우리의 말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싹이 되고, 인권감수성이 돋아나는 건넴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찬란하게 빛내며 흩날리는 벚꽃을 보기가 시린 4월16일. 세월호참사 5주기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2014년에 멈춰버린 시간을 사는 세월호참사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하루다. 그들은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고 기억식에서 외쳤다.

“119에 신고했던 그 순간 우리 아이들은 살아 있었습니다. 구조할 100분이 있었습니다. 구하지 않아 죽은 겁니다. 국민을 보호하고 구해야 할 국가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해경지휘부가, 박근혜 청와대가 아이들을 죽였습니다. 6주기, 7주기가 되기 전에 이들을 처벌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강구해주십시오.”(고 장준형의 아버지 장훈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진상규명이 처음부터 오래 걸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미로가 출구를 감추고 있을 뿐 그 출구로 나올 수 없다면 우리는 또 다른 출구를 찾아 미로를 벗어날 것입니다.”(장애진 세월호 생존학생 모임 메모리아 대표)

▲ 세월호 생존 학생 장애진씨가 4월16일 오후 3시 안산 화랑유원지 3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참사 5주기 기억식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글을 읽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 세월호 생존 학생 장애진씨가 4월16일 오후 3시 안산 화랑유원지 3주차장에서 열린 세월호참사 5주기 기억식에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글을 읽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진실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법적 처벌을 받은 사람은 123정 경장 한명밖에 없다. 구조의 책임을 방기하고 진실을 은폐하고 방해했던 사람들이 있다.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은 김석균 전 해양경찰청장과 김수현 서해해경청장 등과 은폐를 지시한 청와대 책임자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다짐하는지도 모른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책임자가 처벌될 때까지, 재난과 위험으로부터 모두가 안전해질 때까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동료로서 피해자들과 함께 그날을 기억할 것이라고…. 사실 기억의 힘으로 우리는 더디지만 진실을 향해, 생명과 존엄의 사회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고 있다.

고성산불에서 드러난 재난대응 공백

그 노력의 결과 국가의 재난 대응방식이나 체계가 개선되고 있다. 얼마 전 고성산불에서 정부 대처는 세월호참사 때보다 나아졌다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현장대응체계의 개선으로 시민들을 구할 신속한 대응을 했다고 평가한다. 

육상의 재난은 소방청이 지휘를 맡았기에 전국의 소방력을 동원했다. 소방청 지휘 아래 많은 소방헬기와 소방차가 현장에 모였다. 여전히 소방청이 지방자치단체 소방본부에 지원을 요청하더라도 시·도지사 승인을 얻느라 소방헬기가 즉각 출동하지 못한 곳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이전의 어수선하고 청와대와 안전행정부에 보고하느라 현장구조를 방기했던 세월호 참사 때와 비교하면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재난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했기에 신속한 대피도 할 수 있었다. 고성으로 수학여행을 간 평택 현화중학교 학생들은 짧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화재지역을 탈출해 목숨을 구했다.

소수자에게 인색한 재난 대응체계

그러나 한국의 재난대응에서 놓친 부분이 있다. 바로 소수자를 위한 재난대응 및 체계, 자원이다. 재난에서 구조 받을 권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보장돼야 한다. 부자나 정치인이라서 빨리 구조하거나 장애인이라서 나중에 구조돼선 안 된다. 재난에 처한 사람들 중에는 아이도 있고 노인이나 장애인도 있기에 이를 고려한 대피와 구조방식이 있어야 한다.

▲ 지난 4일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 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인근 동해시 망상동으로 확산하면서 동해고속도로 옥계∼동해구간 양방향 차량 통행이 전면 통제되고 있다. 사진=전영래 노컷뉴스 기자
▲ 지난 4일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 한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인근 동해시 망상동으로 확산하면서 동해고속도로 옥계∼동해구간 양방향 차량 통행이 전면 통제되고 있다. 사진=전영래 노컷뉴스 기자

이번에도 산불이라는 재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원이 현저히 부족한 사람들에 대한 조치는 없었다. 고성산불 당시 공중파 방송 한 군데도 수어통역을 제때 제공하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통역만이 아니라 해설자막이나 방송해설도 없었다. 산불이 난 지역에 청각장애인이 없을 것이라는 단정은 안전대책이 비장애인 중심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에 농인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은 홈페이지에 수어 콘텐츠만 볼 곳을 마련해 수어로 브리핑을 제공한다. 장애인들은 행정안전부, 방송통신위원회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진정을 했다.

재난에 더 취약한 장애인, 피해 복구도 불평등

재난 상황을 알 권리는 재난지역 사람들 권리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재난상황은 재난지역 아닌 곳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 시민들도 알아야 한다.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야 뭘 할지 가늠하지 않은가. 세월호 참사 때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이 제공되지 않아 많은 시각장애인들은 뉴스를 보면서도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앞서 미국의 수어 브리핑과 비교하면 한국의 재난안전체계는 불평등하다. 재난불평등은 재난 발생의 불평등 만이 아니라 대처나 그로 인한 결과도 불평등함을 뜻한다. 사회경제적으로 낮은 위치, 가난하거나 차별받는 이들은 재난에 처할 가능성이 더 높다. 낡은 건축물과 대피로 없는 건물의 거주자는 튼튼하고 안전한 건물에 사는 사람들보다 화재나 무너짐 위기에 처할 확률이 높고 피해정도가 심할 수밖에 없다. 쪽방촌이나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은 화재나 지진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작년 고시원 화재사건에서도 잔인하게 확인됐다. 이미 오랫동안 여러 장애인이 이런 재난불평등으로 죽었다.

장애인등급제가 없었다면 살았을 목숨인데

국가의 재난 대처도 그렇다. 장애인이나 거동이 힘든 노인을 위한 대응체계가 없으니 이들이 구조될 확률은 적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다음날인 2014년 4월17일 새벽 화재를 피할 수도, 구조를 요청할 수도 없었던 장애인 송국현씨가 화마에 휩싸여 다음날 숨졌다. 24시간 활동지원제도가 있었더라면, 장애인등급제가 폐지됐다면 그는 화재를 피하거나 구조를 요청해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재난으로 인한 결과도 불평등하다. 가난한 이들은 재난으로 건강이나 집을 잃으면 복구할 개인적 자원이 없고 국가의 지원체계도 없으니 더 가난하고 더 불건강해진다. 반면 기업은 재난을 상품으로 만들어 돈 벌 기회로 만든다. 가난한 이는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이윤을 내는 ‘재난자본주의’다. 따라서 재난불평등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재난대응체계 마련에 포함돼야 한다.

고성산불을 겪은 우리는 4월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에 기억해야 한다. 5년전 4월16일 세월호 참사와 이틀 뒤 고 송국현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다른 일이 아니다. 국가가 재난에서 국민을 구조할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지켜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평등으로 한발 더 내딛을 때 재난으로부터 더 안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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