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집회 금지 장소 조항이었던 집시법 11조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현재 국회에는 이에 대한 개정안이 여럿 발의된 상태다. 하지만 개정안의 대부분이 집회 금지 규정을 유지하며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단서를 두는 식이다. 공권력은 제한과 금지가 넘쳐나는 집시법을 들먹이며 언제나 탄압해왔다.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면서 끊임없이 목소리와 행동을 이어온 것이 집회의 자유를 지켜온 역사다. 집회 금지 성역 규정에 다름 아닌 집시법 11조를 이유로 가로막혀왔던 목소리들을 다시 들어본다. 국무총리공관, 국회의사당, 대사관, 법원, 청와대 앞, 그때 그곳에서 내고자 했던 다양한 외침들이 모여 지금 함께 요구한다. 집회 금지 성역을 열어라! 집시법 11조를 폐지하라! - 편집자주

예수도 집시법을 위반한 범죄자이다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착각이 교만을 가져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집시법 11조를 어긴 범죄자가 되었다. 솔직히 가톨릭 수도자이며 신부인 나로서는 아직도 당황스럽다. 이 상황을 애써 잊으려고 예수도 나와 같은 범죄자였는데 하며 자기 위안을 해본다. 예수는 비정규직 목수 노동자였다. 예수는 성역인 성전에서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처럼 억압 받는 이들과 함께 기득권 세력에 대항했다. 그 지배세력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예수가 너무나 불편했다. 그런 예수에게 여러 가지 혐의를 씌웠고 그중 하나가 지금의 집시법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선동하고 소요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체포하였다. 감히 예수와 비교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억지스럽지만 어쨌거나 집시법을 위반한 범죄자라는 처지가 비슷하다. 집회시위를 하는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로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달라는 간절한 요청이다. 제 아무리 억울함을 토로하더라도 들어주는 이가 없다면 과연 한 맺힌 억울함이 제대로 풀릴까? 나의 억울함을 들어주는 이나 들어주는 곳이 없다면 이거만큼 서글픈 것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억울해 죽겠는데 혼자서 넋두리처럼 울부짖는다면 얼마나 환장하고 까무러칠 일인가?

나는 가톨릭 수도자이며 신부이다. 가끔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소통에 대해 신자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불경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신자들에게 언제나 하느님께 좋은 말로 기도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라고 말한다. 안 그래도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데 이래저래 속상한 일이 많은 신자들이 대부분 일 것이다. 그 속상함을 맘껏 표현하지 못한다면 이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식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억울함, 분노, 절망, 탄식을 듣기 위해서라도 존재하는 것이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하라고 신자들에게 주문한다. 고인이 된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 소설가는 생전에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남편과 외아들을 연이어 잃고 나서 하느님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가득해 십자가를 바닥에 내팽개 쳐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라도 하느님은 있어야 된다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하느님이 안 계셨더라면 살긴 살았겠지만 온전하게 살아가지 못했을 거라고 고백했다. 자신의 속상함을 들어주는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런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기도를 하라고 늘 강조한다. 이처럼 가톨릭교회에서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기도라고 한다. 이 기도는 말 그대로 장소의 구애 없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 한 시민이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항의하듯 “집시법은 위헌이다”라는 글귀를 적어놓았다. 사진=민중의소리
▲ 한 시민이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항의하듯 “집시법은 위헌이다”라는 글귀를 적어놓았다. 사진=민중의소리
지금까지 글을 읽는 동안에 대체 집회, 시위와 기도가 무슨 관계냐며 의문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먼저 내가 위반한 집시법 11조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집시법 11조는 다음과 같다. “국회와 각급 법원, 헌법재판소 등의 청사 또는 저택의 경계 지점으로부터 100m 이내 장소에서 옥외 집회를 열거나 시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집시법 11조에 대해 2018년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는 헌법 21조 1항을 들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올해 2019년까지 국회는 해당 조항을 개정해야 된다. 아직도 어처구니없는 기억이 선연하다. 2015년 2월 5일 희망연대노조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오체투지를 하기 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니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날 국회로 갔다. 막상 가보니 기자회견 장소인 국회 정문 담장 앞으로 가기까지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미 경찰들이 마치 계엄군이 점령하듯 줄지어 도열하고 있어서 기자회견은 도무지 불가능했다. 어렵사리 시작한 기자회견을 경찰은 불법집회 운운하며 해산명령 방송으로 방해하였고 끝내 자의적인 판단으로 집회로 간주해 무산시켰다.

결국 경찰의 강제해산으로 연행자가 속출하였고 집시법 11조 위반으로 기소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 역시 그날 기자회견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검찰은 벌금 200만원으로 약식 기소하였다. 나는 헌법에 보장된 집회시위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본권 침해는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해서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1심 재판에서 오히려 검찰은 100만원이 더 많은 300만을 구형했고 올해 1월 집시법 11조 위반은 무죄로 선고받았지만 일반교통방해죄는 유죄로 인정되어 100만원을 선고받아 현재 항소한 상태이다. 이제 아무 관련 없는 기도와 집시법이 어떻게 상통한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도와 집회는 주체가 있고 듣는 대상을 향해 간절히 외친다는 점과 이뤄졌으면 하는 절박함이 담겨져 있다는 게 비슷하다.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간에 기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은 절박함과 거룩함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말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기도이다. 집회 또한 그러하다. 이처럼 국회는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듯 집회하는 이들에게 불통의 성역이 아니라 소통의 창구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고통 받는 이들의 피난처이며 그들의 절박한 외침을 들어줘야 되는 게 국회의 기능이며 국회의원의 역할이다. 고통 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고 소통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국회는 존재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국회는 철옹성 같은 성역이 아니라 소통의 장이다

국회의원들이 당선되기 전과 후에 한결같이 입버릇처럼 하는 약속이 있다. 바로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국민과 소통하겠다고 말이다. 소통과 봉사는 자신들의 지역구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국회에 찾아온 수많은 민중들과 마땅히 소통해야 한다. 따라서 국회에서의 우리의 외침은 정당한 권리이고 들어야 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당연한 의무이다. 하지만 2015년 2월 5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울부짖음에 누구 하나 제대로 성실히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뭐가 그리 두려웠을까? 국회 정문 앞 담장에서 국회 본관까지의 거리는 상당하다.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거리인데도 오히려 경찰의 철벽으로 가로막고 불통을 일관하는 그들이었다. 국회는 민중들이 들어갈 수 없는 절대금지 성역이 아니다. 집시법 11조 존재 근거에 대한 또 다른 이유는 업무에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국회 본연의 업무는 듣고 소통하는 것이다. 이를 망각한 채 만남을 거부하고 듣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업무에 방해 받지 않겠다는 주장을 한단 말인가?

과거 우리 역사에 신문고와 격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물론 지금과는 다른 왕정체제라 실효성의 한계는 있었지만 중요한 건 성역인 궁궐의 문턱을 낮추고 임금과의 거리를 좁혀 억울한 백성들과 소통을 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 억울한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기보다는 업무에 방해된다며 집시법 11조의 존치를 바라는 국회의원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실천 없이 말로만 봉사와 소통을 이야기 한다. 개인적으로 국회 정문 앞 담장을 허물고 더 나아가서는 국회의사당 앞 광장이 개방되기를 희망한다. 이 희망이 더더욱 간절했던 건 지난 4월 3일 국회 앞에서 있었던 민주노총 집회였다. 이날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국회 환노위에서 “탄력근로제 확대”와 “최저임금결정체계 개편” 이 두 법안의 처리를 저지하고자 국회 진입을 시도했지만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동안 노동계에서는 이 두 법안을 노동악법이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천명했다. 그러나 국회 환노위 의원들은 노동자들의 외침을 무시했다. 틈만 나면 민의를 수렴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경찰을 방패삼아 만남을 거부했다. 대체 왜 이리도 만남을 거부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걸까? 이는 언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언론의 사명은 객관과 공정보도이다. 하지만 이날 몇몇 언론들은 노동자들의 처절한 외침에는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집회 중에 국회 담장이 허물어진 결과만을 놓고서 폭력시위라고 비난하며 여론몰이를 되풀이 했다. 늘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를 확대해서 사안의 본질을 왜곡하는 언론의 태도와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국회의원들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집시법 11조는 폐지돼야 한다

사실 걱정이 앞선다. 이날 집회로 헌법 취지에 부합하지 않은 방향으로 독소조항으로 가득찬 개악을 시도하지 않을까 말이다. 집시법 11조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국회의원들의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시법 11조는 그동안 그들의 방패가 되어 근무태만을 합법화 시켰다. 어떻게 이 부당함을 합법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국회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만남을 통해 이익을 챙기지 말고 국회광장으로 나가 노동자들을 비롯해 이 땅에 억압과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민중들의 외침을 들었으면 한다. 그러나 집시법 11조는 우리의 정당한 외침을 틀어막고 침묵하기를 강요한다. 더 이상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일이 없도록 집시법 11조를 폐지할 것을 국회에 강력히 촉구한다. 그런데 분명 신부가 왜 이런 일로 왈가왈부하느냐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강도에게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초주검이 된 이웃을 모두가 외면했지만 그 이웃을 도와준 건 오직 사마리아인뿐이었다. 초주검이 된 나의 이웃인 노동자들이 국회 정문 앞 마당에서 쓰러져 있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외면하면 당장은 경찰에게 연행되지 않아서 몸이 편할 수는 있겠지만 나의 신앙의 양심상 도저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내 주변에는 부당함에 대해 자신들의 목소리조차도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을 대신해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도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다. 검찰의 항소이유는 내가 동종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고 죄질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집시법 11조가 존치되는 한 나는 죄질이 나쁜 흉악한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겠다. 억울한 범죄자를 양산하고 노동자들과 민중들의 정당한 외침에 귀를 막으며 또한 이들과 연대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억압하는 집시법 11조는 반드시 철폐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성경 말씀을 국회의원들에게 전하며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불행하여라, 불의한 법을 세우고 고통을 주는 규정들만 써 내가는 자들!!!” (이사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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