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한국은행 총재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화폐개혁을 언급했다. 당시 한은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 논의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은 총재는 지난 18일엔 “리디노미네이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가까운 시일 내에 추진할 계획도 없다”며 한달전 발언은 원론적 답변이었다고 한발 물러났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가치는 그대로 두되 단위만 줄이는 화폐개혁이다. 1000원을 1원으로 줄이는 방식이다. 1달러가 1200원쯤 하는데, OECD 나라 가운데 1달러의 교환가치가 1000원이 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화폐단위가 커 환율 계산 때 불편하고, 우리 경제 위상에도 안 맞는다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나왔다.
우리 정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한 건 1950년이 처음이다. 이후 1953년, 1962년까지 모두 3번의 경험이 있다.
1950년 화폐개혁은 한국전쟁으로 서울을 점령당한 뒤 한국은행을 장악한 북한군의 시장 교란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1953년 화폐개혁도 전쟁 직후 위축된 생산활동과 치솟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100 대 1로 화폐단위를 하향 조정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이었다. 1950년, 1953년 둘 다 한국전쟁이라는 경제외적 이유가 작용했다.
반면 1962년 6월10일 전격 단행된 화폐개혁은 우리 정부가 경제를 이유로 내건 처음이자 마지막 화폐개혁이었다. 이때 박정희 군사정부는 경기를 활성화시킨다며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단위를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액면가를 10 대 1로 또 다시 하향 조정했다. 그러나 현금과 예금 동결로 산업을 더 위축시켜 시행 한 달도 안 돼 실패로 끝났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당시 국가최고회의 의장이란 이상한 직함을 쓰는 군인이었다. 이 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화폐개혁 실패에 대해 관계자를 처벌해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했다. 박 의장은 “처벌한다면 의장인 내가 처벌 받아야지요”하고 웃어 넘겼다.
60~70년대 두 번이나 외무부장관을 지낸 외교관 고 김용식씨는 자서전 ‘새벽의 약속’에 당시 화폐개혁을 언급했다. 그 때 김 전 장관은 영국대사였다. “정래혁 상공부 장관이 런던 와서 화폐개혁을 위해 런던의 토머스 데라루(Thomas De La Rue)사에서 지폐를 인쇄하라는 비밀 지령을 전했다. 나는 주무장관인 천병규에게 화폐개혁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소용 없었다. 3개월간 극비작전 끝에 인쇄가 끝나 네덜란드 국적 배에 군수품으로 위장해 부산항으로 보냈다. 혁명정부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나의 걱정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정권의 2인자 김종필도 “화폐개혁은 실패했다. 명백히 인정하고 대책을 철저히 강구할 도리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 회장 같은 이도 힘들었다니 국민들은 어땠을까. 이렇게 박정희 같은 군인은 모의 군사훈련하듯 나라를 운영했다. 그 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국민들 뇌리에 오래 남아 진작에 했어야 할 화폐개혁인데 제대로 논의조차 못하고 수십년째 이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