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쳐나는 말과 사건 속에서 인권의 가치를 벼리기 위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들의 고민을 미디어오늘에 연재합니다. 우리의 말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대한 싹이 되고, 인권감수성이 돋아나는 건넴이 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권력은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한다. 이는 권력의 작동을 설명하는 아주 명료한 문장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류는 기나긴 역사를 통해 법과 제도라는 장치를 마련해왔다. 그러나 돈을 가진 자들은 돈으로 권력을 매수하며, 매수당한 권력은 법과 제도를 우회하여 그들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렇게 ‘그것’들은 가능해진다.

콜텍 대법판결에서 사법부는 기업가들의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에 기반하지 않은 추상적이고 임의적인 판단 만으로도 그들이 노동자들을 마음껏 해고할 수 있도록 판례를 만들어놓았다. 이 판례는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과 제도라는 장치를 무화시켰다. ‘그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몇 년 뒤, 양승태의 사법거래 리스트가 세상에 드러났고, 콜텍 해고자들은 알게 되었다. 왜 내 삶이 십수년간 짓밟혔는가를, 왜 우리의 목소리가 철저하게 묵살 당해왔는가를. 그러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났음에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2014년 대법원 판결, 죽음에의 선고

“대법 판결 받을 때 있잖아. ‘당신 이제 죽을 거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 망치 땅, 땅 치니까 끝나버리더라고.”

임재춘 해고자는 2014년 6월에 있던 해고무효소송 대법 판결 당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이 날 “후회할 때도 많았지만, 옳은 길이기 때문에” 그토록 모진 세월을 견디며 길 위에서 싸워온 노동자들에게 사법부는 ‘죽음’을 선고했다.

“오랫동안 투쟁하다보니까 판사 얼굴 보면 딱 안다? 그날 판사 표정 보니까 딱 감이 오더라고.”

그날 그는 예감했다. 부정의(不正義)가 정의(正義)를 무력화시키는 세월을 살아왔으므로 그 시간들이, 경험의 축적이 그것을 예감할 수 있게 했다. 그래도 “설마설마 했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정의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고 죽는 문제가 걸린 콜텍 해고자들은 살기 위해 저항하지만, 공권력과 정부는 점잖게 죽음에 준하는 폭력을 그들에게 행사한다. 사법부는 비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목숨값을 거래했고, 적폐청산을 내세우는 정부는 콜텍 해고자들이 당한 ‘사법부의 적폐’를 청산하지 않으면서, 심지어 국내 노동자들을 해고하여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수출 실적을 높인 기업을 ‘세계 일류상품 생산기업’으로 선정하여 각종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포상하고 있다. 게다가 공권력은 빼앗은 자를 위해 빼앗긴 자들을 밀쳐낸다. 사장을 만나기 위해 복도에 앉은 해고자 대여섯명으로부터 순이익 100억대의 자본을 보호하기 위해 공권력은 밤낮없이 콜텍 회사 앞을 지키고 해고자들에게 완력을 행사했다.

“요즘은 생각하는 게 결과는 죽음밖에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오늘로 단식 35일차를 맞는 해고자는, 13년간 한결같이 거리에서 싸워온 해고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읽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기한 단식투쟁 중의 어느 날에 “원한다면 목숨을 가져가라”고 절규했다. 주변에 산발하던 소음들이 한 순간에 가라앉았다. 빼앗긴 자가 빼앗은 자에게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호소하는 상황은 끔찍하고도 슬프다.

▲ 4월15일 교섭을 앞두고 서울 등촌동 콜텍 본사 앞에서 콜텍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공대위)가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공대위
▲ 4월15일 교섭을 앞두고 서울 등촌동 콜텍 본사 앞에서 콜텍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공대위)가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공대위
미래를 빼앗는 자들

“언제 (투쟁이)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후 삶을 그려볼 수가 없어요.”

삶의 계획에 대해 질문하자 이인근 콜텍지회 지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미래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법부는 그들로부터 미래를 빼앗았다. 대법원은 경영자의 안정하다고 예측되는 미래를 보호하면서 노동자의 불안정한 미래를 그마저 아예 삭제시켰다.

“콜텍 (해고무효소송) 판결로 인해서 근로기준법 제 24조에 나와있는 ‘해고의 요건’이라는 법 조항이 쓸모없게 된 거잖아요. 사법부가 법을 새로 만든 격이에요.”

대법원은 십수년을 매년 흑자를 내고 있고, 부채도 없는 회사((주)콜텍)의 미래에 도래할지도 모를 경영위기를 내세워 정리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미래는 과거를 바탕으로 예측된다. 매년 흑자 신화를 이루어온 기업은 지금도 여전히 신화를 유지 중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주)콜텍은 2007년 국내 공장을 폐업하여 노동자들을 죄다 해고한 후로 10년 동안 순이익 1000억을 달성하였다. 정리해고 당시에도 부채도 없는 알짜배기 흑자 기업이었던 (주)콜텍에 사법부가 추측한 ‘도래할 지도 모를 경영위기’는 너무 당연하게도 도래하지 않았다. 수백명의 해고자들에게 주어야 할 돈을 빼앗은 회사는 자회자를 만들고 규모와 범위를 확산하며 가족들에게 가업을 물려주면서 자신들의 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 반면 회사의 휴업과 폐업, 그리고 정리해고를 겪은 노동자들의 미래는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예측했을 때, 매우 불안정하다. 해고 당사자들은 미래가 상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미래는 없는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그들로부터 미래를 빼앗은 법원, 법원의 불법행위 결과에 대한 구제책을 내놓지 않는 정권은 한 몸이다.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 정부의 허구성

공공의 이익이 비합법적으로 확대될 때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 부른다. 특정 개인의 이익이 비합법적으로 확대될 때 우리는 그것을 비리라 부른다. 우리는 때로 혁명의 도래를 꿈꾸지만, 비리가 가득한 세상을 바라지는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 정부임을 자임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비리를 방치, 조장하고 있다. 공공의 이익 확대를 기대하며 수립된 정부가 특정 개인들의 이익이 확대되는 것을 방치하고 수호하기까지 하는 이 괴이한 현상. 현 정부의 선언과 국정운영 사이에는 이렇듯 심각한 모순이 존재한다.

문재인 정권은 감추는 데 능하다. 내용은 이전의 정권과 다를 바 없지만, 아니 오히려 어느 지점에서는 후퇴하고 있지만, 그것을 선전으로 잘 감추어낸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여타 정권들보다 위험하다. 불공정한 것들을 공정한 것으로 호도하면서 불공정의 범위를 넓히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 중심, 노동존중 정부라는 선전과는 다르게 반인권적인 노동개악(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 개악안-‘국제인권기구의 권고와 반대로 가는 노동정책’ 참고)을 추진하여 노동권을 비롯한 사회권을 후퇴시키고 있으며, 그것이 공정한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선전한다. 사법부의 부정거래로 13년째 복직투쟁 중인 해고자들을 외면하면서 적폐를 청산하겠다 한다.

[ 관련 기고 : 노동자가 묻습니다 “文 정부 어디까지 후퇴하렵니까” ]

‘사람이 먼저다’라는 이 정권의 선전은 허구다. 선언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책임을 누구나 지는 것은 아니다. 선언의 허구 여부를 판단하려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법과 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는지를 보면 된다. 문재인 정부는 이명박근혜 정부와 스스로를 구분하면서 ‘사람’을 거론했지만, 그들 역시도 이명박근혜와 다르지 않다. (주)콜텍은 2012년부터 ‘세계 일류 상품 생산기업’에 선정되어 정부의 각종 지원혜택을 받아왔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선언한 정부는 인권을 짓밟는 기업을 포상함으로써 자신의 선언이 허구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 4월15일 교섭을 앞두고 서울 등촌동 콜텍 본사 앞에서 콜텍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공대위)가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공대위
▲ 4월15일 교섭을 앞두고 서울 등촌동 콜텍 본사 앞에서 콜텍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공대위)가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공대위
찜 솥에 갇힌 개구리를 죽이는 방법

문재인 정부는 ‘이윤 제일’을 말하지 않지만, 이윤 추구가 제일의 가치인 것처럼 법과 제도를 집행한다. 위법하게 법을 집행한 사법부의 불법행위 결과에 대한 구제책을 내놓지 않으며, 위법의 피해자인 해고자들의 목소리를 묵살한다. 이 나라 경제를 위해 청년 시절을 자욱한 분진 속에서, 유기용제의 유독가스 속에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는 장비는 고작 싸구려 마스크 한 장이었던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묵살’하면서, 그들의 노력을, 삶을 싸구려 취급하고 급기야 휴지조각처럼 내버린 기업을 포상하는 정부. 이처럼 ‘묵살’이라는 행위에는 행하는 자의 선명한 정치적 ‘의도’와 ‘의지’가 있다.

찜 솥에 갇힌 개구리의 결말은 죽음이다. 개구리는 서서히 죽어가는 동안 비극을 예감하지 못한다. 때문에 솥뚜껑을 열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는다. 솥의 온도를 서서히 올리는 것과 빠른 속도로 올리는 것은 위기에 대한 감각을 죽이는 전략의 차이일 뿐 결말은 같다. 어느 사이 잘 삶긴 주검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솥뚜껑을 열기 위해 발버둥치는 움직임에, 목소리에 함께 해야 한다.

솥뚜껑을 열어야 봄이 있다. 우리가 애태워 기다리는 봄은, 이미 거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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