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EBS 새 대표로 온 김명중 사장이 지난 8일 첫 인사를 했다. 부사장 내정자가 과거 반민특위 다큐를 만들던 김진혁 PD(현 한예종 교수)를 다른 부서로 보내는 등의 이유로 사내 젊은 PD들 사이에서 ‘최악의 PD’로 꼽힌 인물이고 부서장(본부장) 인사에 ‘박근혜 홍보영상 책임자’ 등이 포함됐다며 언론단체들이 반발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2015~2016년 EBS는 ‘희망나눔 드림인’이란 이름으로 정부정책을 홍보하는 영상 36편을 제작했고 청와대 지시에 따라 영상 끝에 박근혜씨 사진을 넣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이 영상 주제와 일정 등을 주도해 EBS가 ‘관영방송’ 노릇을 했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관련기사 : EBS, 청와대 지시받아 박근혜 홍보영상 찍었나]

▲ 희망나눔드림인 영상 갈무리, 화면 오른쪽 위에 당시 대통령 박근혜씨 사진은 청와대 행정관이 EBS의 독립(외주)제작사에게 보낸 사진이다.
▲ 희망나눔드림인 영상 갈무리, 화면 오른쪽 위에 당시 대통령 박근혜씨 사진은 청와대 행정관이 EBS의 독립(외주)제작사에게 보낸 사진이다.
▲ 2015년 8월24일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이 당시 대통령 사진을 제작사 대표 A씨에게 보낸 메일
▲ 2015년 8월24일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이 당시 대통령 사진을 제작사 대표 A씨에게 보낸 메일

인사가 난 8일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부장 재직 시 박근혜정권 홍보에 힘쓴 자 등을 부서장에 발탁했다”고 했고, 10일 언론노조 EBS지부가 “박근혜 홍보 영상의 제작부서 책임자 등 방송공정성을 훼손하고 시대착오적 행위를 저지른 자들이 대거 등용됐다”며 “교육공영방송 인사라고는 믿기지 않는 막장인사”라고 했다. 12일 한국PD연합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홍보영상 제작 책임자 등 EBS의 공정성을 훼손하고 구성원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한 인물들이 등용됐다”고 지적했다.

언론단체들이 거론한 인물은 이번에 학교교육본부장으로 승진한 황아무개씨다. 2015년 당시 황씨는 편성운영부장이었는데 ‘박근혜 홍보영상’ 예산 중 일부가 편성운영부 예산이었다. 이를 근거로 EBS노조 등은 ‘박근혜 홍보 영상의 제작부서 책임자’로 규정했다.

미디어오늘이 황씨와 당시 영상 실무를 담당한 제작사 대표 A씨 등을 취재한 결과 황씨가 부장으로 있던 편성운영부 예산이 ‘박근혜 홍보영상’을 만드는데 쓰인 건 사실이지만 황씨는 예산사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황씨가 해외 연수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편성운영부 예산을 사용하기로 회사 차원의 결정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황씨가 계속 ‘박근혜 홍보영상’ 예산 사용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자 다음해인 2016년 EBS는 편성운영부가 아닌 다른 부서 예산으로 제작비를 충당했다.

제작사 대표 A씨는 미디어오늘에 “홍보영상 작업에서 청와대가 CP(책임프로듀서)역할을 했고 실제 제작을 내가 했다”며 “EBS에선 이를 주도한 게 대외협력부였다”고 말해왔다. 이 중에서도 이명박 정부 초기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동하다가 EBS를 휴직한 채 이명박 청와대 대변인 행정관으로 약 2년간 근무한 뒤 EBS에 복귀한 김아무개씨 등이 대외협력부에서 일을 주도했다.

황씨는 12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김씨는 당시 (정권이나 사장 등에게) 힘을 받는 사람이었다”며 “‘편성운영부에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내가 2015년 6~7월경 라다크(히말라야 서쪽의 한 지역)에 자기계발연수를 떠났을 때 그 사이에 밀고 들어왔다(편성운영부 사업에 홍보영상을 집어넣었다)”고 말했다.

이에 A씨는 “황씨의 주장은 사실”이라며 “편성운영부는 정규 방송이 아닌 캠페인 등의 일을 맡는 부서라서 김씨가 편성운영부에 일을 맡기려 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청와대에 전화하기도 싫고 예산은 뺏겼지만 검수까지 하긴 싫어서 송출 역할만 했다”고 했다. 노조 등이 김명중 사장의 불통과 불합리한 인사를 지적하면서 ‘박근혜 홍보영상’에 개입한 부서 책임자로 황씨를 거론할 순 있겠지만 적어도 ‘제작 책임자’라고 한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 한국교육방송공사 로고
▲ 한국교육방송공사 로고

황씨의 이름이 오르내린 건 A씨가 감사원 등 국가기관에 이 사건을 신고하면서부터다. 감사원은 지난해 초 EBS에 사실관계를 확인했고, A씨는 당시 ‘박근혜 홍보영상’을 주도한 인물로 대외협력부 소속 김씨 등을 거론했다. 2018년 2월 황씨와 A씨의 통화내용을 보면 김씨가 ‘난 권한도 없고 잘 모르는 일’이라며 황씨에게 책임을 떠넘긴 정황이 나온다. 미디어오늘이 지난해 말부터 ‘박근혜 홍보영상’ 보도를 이어가자 최근 김씨는 EBS를 떠났다.

[관련기사 : EBS 기자, 청와대 다녀온 뒤 박근혜 홍보영상 제작 개입]

‘박근혜 홍보영상’ 개인에게 물을 책임인가

결국 EBS가 제대로 진상조사조차 진행하지 않아서 벌어진 논란이다. EBS가 KBS 등과 같이 과거 방송 불공정 사례를 조사하고 기록하는 최소한의 노력을 했다면 황씨가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고 얼마나 저항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EBS와 수년간 일을 했고 홍보영상 실무를 맡은 A씨는 “EBS 내에서 많은 이들이 내가 ‘박근혜 홍보영상’을 만드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이게 문제라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미디어오늘 보도 이후에야 EBS노조는 EBS 측에 감사를 요청했지만 4월 현재까지 EBS 이사회나 EBS 측은 관련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EBS 경영진은 적폐청산에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지난해 12월21일 EBS 시청자위원회에서 조규조 당시 부사장(사장 직무대행)은 “EBS 구성원은 적폐청산보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EBS의 사명을 더 구체화하고 방송목표를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구현할 것인지 고민이 크다”며 해당 영상제작을 “공익에 기반한 국가정책홍보 캠페인”으로 표현했다.

다음달인 지난 1월23일 열린 EBS 시청자위원회에서도 관련 질의가 나왔다. 김현식 시청자위원은 “내부 조사활동이 있었는지 등 지난 한달 간 진행상황, EBS 노조에서 사측에 노사동수위원회를 구성해 철저히 조사하자고 요청했는데 어찌됐는지, EBS 이사회에서 이 건을 논의했는지” 등을 물었다.

그러자 조규조 당시 부사장은 “감사원에서 감사한 사안에 대해 내부 감사가 또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며 “조사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노조 제안을 별도로 진전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어 “이사회에서 우리(경영진)가 설명했고 이사회에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후엔 시청자위원회에서도 관련 내용을 논의하지 않았다.

▲ 김명중 EBS 사장
▲ 김명중 EBS 사장

사장이 바뀌었지만 EBS의 입장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오늘은 새 사장이 임명 이후인 지난달 27일과 지난 10일 진상조사 등을 할 것인지 EBS의 입장을 물었지만 EBS는 답을 주지 않았다.

A씨는 “황씨가 얼마나 잘못이 있는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며 “하지만 더 중요한 건 EBS가 조직적으로 청와대 홍보에 개입했고 다수가 묵인했으며 지금 와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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