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제정된 낙태죄가 66년 만에 위헌으로 결정됐다. 헌법재판소(소장 유남석)는 11일 재판관 7대2 의견으로 형법상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낙태죄 조항은 위헌이지만 임신 초기를 넘어선 모든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면 사회적 혼란이 우려된다면서, 관련법 개정 때까지 효력을 유지시켰다. 국회는 내년 연말까지 개선입법을 이행해야 하고, 그때까지 개선입법이 이뤄지지 않으면 2021년 1월1일부터 낙태죄는 효력을 잃는다.

헌법재판소(소장 유남석)는 이날 다수의견으로 “자기낙태죄 조항은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정도를 넘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법익균형성 원칙도 위반했으므로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규정”이라고 밝혔다. 부녀의 촉탁·승낙을 받아 낙태한 의사를 형사처벌하는 의사낙태죄 조항도 위헌으로 판단했다.

헌재는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자기결정권에 여성이 임신을 유지할지 결정할 권리가 포함된다고 봤다. 또 임신 사실을 인지하고, 국가의 임신·출산·육아 지원정책에 정보를 수집해 낙태 수술에 이르기까지 충분한 기간이 보장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를 결정하는데 필요한 ‘결정가능기간’은 임신 22주 내외로 봤다. 22주를 넘긴 태아는 산모 몸 바깥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산부인과 학계 판단을 근거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 헌법재판소가 11일 낙태죄 처벌을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 연합뉴스
▲ 헌법재판소가 11일 낙태죄 처벌을 규정한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 연합뉴스

형법상 낙태죄가 사실상 사문화돼 낙태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은 점도 반영됐다. 태아 생명권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낙태죄가 실제 태아를 보호하는 역할은 못한다는 것이다. 헌재는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고 낙태를 감소시킬 사회·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는 등 사전·사후적 조치를 종합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실효성 있는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예외적으로 낙태 허용 사유를 규정한 모자보건법에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갈등 상황’이 반영돼 있지 않은 점도 문제로 봤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유전학적 정신·신체질환이나 일부 전염성 질환,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인척 간 임신 등에 한해 본인이나 배우자 동의를 얻은 낙태를 허용한다. 강간·준강간에 의한 임신도 임신 당사자가 피해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한계가 지적돼 왔다.

다수 재판관은 이 예외에 해당하지 않으면 모든 낙태가 전면·일률적 범죄행위로 규율돼 낙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될 수 없고, 미성년자나 저소득층 여성이 적절한 시기에 수술 받기 쉽지 않다고 밝혔다. 다수 재판관은 낙태죄가 일부 헤어진 상대 남성의 복수나 괴롭힘 수단, 가사·민사 분쟁 압박수단 등으로 악용된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자기낙태죄 조항의 위헌성이 인정되면서 임신한 여성 부탁이나 승낙에 따라 낙태한 의사를 처벌하는 의사낙태죄 조항도 위헌으로 봤다.

‘단순위헌’ 주장 3인 “원칙적 낙태 금지는 사실상 자기결정권 박탈”

여기까지는 재판관 9명 중 7명이 의견을 같이 했다. 다만 입법적인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는 ‘헌법불합치’ 의견이 4명(유남석, 서기석, 이선애, 이영진)으로, 낙태죄를 당장 전면폐지해야 한다는 ‘단순위헌’ 3명보다 다수를 차지하면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4인 재판관은 “단순 위헌 결정할 경우, 임신 기간 전체에 걸쳐 행해진 모든 낙태를 처벌할 수 없어 용인하기 어려운 법적 공백이 생긴다”는 점을 우려했다. 

반면 단순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3명(이석태, 이은애, 김기영)은 “임신기간 전체에 걸쳐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면서 낙태가 허용될 예외적 사유를 법률로써 규정하는 방식은 ‘낙태가 불가피한 사람’의 지위를 부여해 법적 책임을 면제할 뿐, 사실상 자기결정권을 부정 내지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관 3인은 임신한 지 첫 14주 무렵인 ‘임신 제1삼분기’까지는 임신한 여성이 제한 없이 낙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다. 다만 이 시기를 넘어선다면, 수술 과정에서 위험성이 높아져 태아 뿐 아니라 임신한 여성의 생명이나 건강 보호를 저해할 수 있기에 제한할 수 있다고 봤다. 낙태죄를 유지하면서 허용 사유를 넓히는 것보다는, 낙태죄 폐지를 전제로 제한 조항을 두자는 것이다.

사회 혼란이 우려된다는 헌법불합치 결정 이유에는 예방효과가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낙태죄를 폐기한다고 해서 극심한 법적 혼란이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또 낙태죄로 기소가 가능하도록 둔채 사후입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규율 공백을 개인에게 부담시켜 가혹하다”고 밝혔다.

소수의견 2인 “낙태할 권리는 자기결정권 아냐…임신·출산 책임져야”

2명의 재판관(조용호, 이종석)은 낙태죄가 합헌이므로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을 냈다. 이들은 “출생 전의 생성 중인 생명을 헌법상 생명권 보호대상에서 제외한다면 생명권 보호는 불완전한 것에 그치고 만다”며 “태아가 모체 일부라고 하더라도 임신한 여성에게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소멸시킬 권리, 즉 낙태할 권리가 자기결정권의 내용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재판관 2명은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할 경우 현재보다 낙태가 증가해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임신한 여성의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형사처벌하는 것은 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 방법이므로 수단의 적합성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다수 재판관이 낙태 허용 사유로 제안한 ‘사회·경제적 사유’에는 범위가 모호하다며 “결국 임신한 여성 편의에 따라 낙태를 허용하자는 것인데, 이를 허용할 경우 현실적으로 낙태의 전면 허용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해 일반적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자유와 책임 의무를 규정한 헌법을 들어 “성관계라는 원인을 선택한 이상 그 결과인 임신·출산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위와 같은 헌법 정신에도 맞는다”고 밝혔다.

낙태죄가 임신한 여성에게만 책임을 돌린다는 지적과 관련해서는 “낙태 형사처벌 외에, 미혼부(未婚父) 등 남성의 책임을 강화하는 ‘양육책임법’ 제정, 미혼모에게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 여성이 부담없이 임신·출산·양육할 모성보호정책, 임신한 부부에게 적극적인 지원과 육아시설의 확충 등 낙태를 선택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입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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