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집회 금지 장소 조항이었던 집시법 11조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현재 국회에는 이에 대한 개정안이 여럿 발의된 상태다. 하지만 개정안의 대부분이 집회 금지 규정을 유지하며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단서를 두는 식이다. 공권력은 제한과 금지가 넘쳐나는 집시법을 들먹이며 언제나 탄압해왔다. 이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면서 끊임없이 목소리와 행동을 이어온 것이 집회의 자유를 지켜온 역사다. 집회 금지 성역 규정에 다름 아닌 집시법 11조를 이유로 가로막혀왔던 목소리들을 다시 들어본다. 국무총리공관, 국회의사당, 법원, 대사관, 청와대 앞, 그때 그곳에서 내고자 했던 다양한 외침들이 모여 지금 함께 요구한다. 집회 금지 성역을 열어라! 집시법 11조를 폐지하라! - 편집자주


곧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는다. 5년 전 그날들을 되돌아본다.

세월호 참사 직후, 우리가 계속해서 침묵하길 바랐던 국가

2014년 4월16일 수백 명의 국민이 세월호와 함께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있던 순간, 우리는 어디에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던 ‘국가’에 분노했고 한 순간에 가족을 잃게 된 유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슬퍼했다. 그러나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국민들의 추모와 분노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여전히 국민들에게, 그리고 유가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가족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게 해달라고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진도대교를 건너고자 했던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막아섰던 4월19일.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했던 KBS 보도국장의 막말에 분노해 자녀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KBS 앞으로 향한 세월호 유가족들을 수십 대의 경찰버스를 이용해 막아섰던 5월8일 어버이날 밤. ‘믿을 것은 대통령님밖에 없다’며 대통령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길바닥 위에서 밤을 지새운 유가족들을 가로막고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소비심리 위축’을 걱정했다는 5월9일.

무능하고 무책임한 국가에 분노하고,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에 함께 슬퍼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민 200여명과 100여명을 무차별 연행했던 5월17일 그리고 5월18일.

▲ 4.16세월호가족대책위와 시민들이 2015년 4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는 문화제를 마치고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하자 경찰이 최루액을 쏘고 있다. ⓒ민중의소리 정의철 기자
▲ 4.16세월호가족대책위와 시민들이 2015년 4월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행령 폐기와 세월호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는 문화제를 마치고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하자 경찰이 최루액을 쏘고 있다. ⓒ민중의소리 정의철 기자

거리로 나와 ‘이윤보다 인간’이 우선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해야한다고 외쳤던 시민들을 차가운 유치장 안에 가둬둔 채 대국민담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거짓된 눈물을 바라봐야했던 5월19일.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는 끊임없이 세월호 유가족들과 국민들에게 거리로 나와 시끄럽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했다. 재난참사를 반복적으로 만들어내는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서지 말라. 추모는 혼자 숨죽여 하라. 하지만 이미 침묵은 끝났다. 국가는 우리가 계속 침묵하길 바랐지만, ‘미안하다’, ‘잊지 않겠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우리는 이 부당한 죽음을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착한 사람들’이라는 자족에 멈출 수 없었다. 기억하기 위해 행동해야 했다.

2014년 6월10일 그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87년 6월10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시작한 그날을 기념하는 기념행사가 있는 날이었고,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가 침몰한지 56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며, 세월호 참사로 본질을 드러낸 국가의 모습에 분노하는 시민들 100여명이 모였다.

‘이게 나라입니까’ 6월10일 청와대 앞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외친 말이었다. 인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사회를 유지해온, 그리고 ‘사고’를 ‘참사’로 만든 가장 큰 책임이 청와대에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다시 인간이기를 약속하기 위해서 ‘착한 시민들’에겐 금지된 방향인 청와대로 향했다.

▲ 세월호 유족들이 2014년 8월13일 오후 청와대 면담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무리한 대응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진=김도연 기자
▲ 세월호 유족들이 2014년 8월13일 오후 청와대 면담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경찰의 무리한 대응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진=김도연 기자

침묵할 것을 강요하는 집시법 11조, 하지만 침묵은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채 청와대까지 닿지 못하고 세월호가 침몰하고 50일이 넘는 시간동안 봐왔던 국가의 폭력을 다시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로 향하려던 우리의 걸음은 시작하자마자 경찰에 막혔다. 경찰에게 포위된 채 삼청동 인도 위에서 청와대에 우리의 목소리가 닿길 바라며 외쳤다. “이게 나라입니까’,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경찰들은 시민들이 적당히 해산할 줄 알았는지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던 경찰 대오의 한 쪽을 열며 해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청와대로 가겠다는 시민들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이중 삼중으로 설치된 경찰의 경비를 뚫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시민들이 모였다. 길어지는 대치상황에서 잠시 뒤쪽에서 쉬는 동안 남성 경찰들이 줄지어 시민들을 밀치고 들어왔고 여성 경찰들이 나를 연행해갔다.

경찰버스 안에 앉아있으니 경찰들의 무전이 들려왔다. 우습게도 ‘대장 잡았다’, ‘이제 끝났다’ 따위의 무전들이 들려왔다. 제안자 중 한 명인 나를 연행하면 시민들이 해산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모인 이유는 누군가의 제안 때문이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이 사회의 민낯에 분노하며, 이윤보다 인간인 사회를 만들자는 약속을 위해 모인 것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외침을 청와대가 들어야 하기에 청와대로 향한 것이었다.

나중에 연행된 사람을 통해 듣기로는 나를 연행한 이후에도 계속 대치가 이어지고, 구급차에 실려가는 등 부상자가 속출하자 한 명이 자진해산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와대로 가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이렇게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을 모았다고 한다. 결국 이 날, 67명의 시민들이 연행되었다. 놀랍게도 국무총리공관 100m 이내 집회 금지를 규정한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11조를 위반했다는 혐의였다. 이제와 밝히는 것이지만 사실 그 날 집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 전까지 그곳이 국무총리공관 앞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 날 연행된 이들 대부분이 국무총리공관 100m 이내 집회절대금지를 규정한 집시법 11조 위반의 죄를 물어 적게는 30만원의 벌금에서 많게는 2년의 실형까지 유죄를 선고받았다. 나 역시 2017년 5월 2심에서 200만원의 유죄를 선고받았고, 2019년 4월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 날 함께 경찰에 연행되고, 구속영장마저 발부됐던 정진우 당시 노동당 부대표가 재판과정에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다. 이후 헌법재판소에서 국무총리공관 100m 이내 집회절대금지를 규정한 집시법 11조 3호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심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8년 6월28일, 헌법재판관 전원 일치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비슷한 시기에 국회의사당, 법원 100m 이내 집회절대금지를 규정한 집시법 11조 1호 역시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현재 청와대 100m 이내 집회를 금지하고 있는 같은 조항 2호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집시법 11조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람들을 침묵하게, 특히나 권력의 가까운 곳에서 말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조항이다. 하지만 침묵하지 않고, 침묵할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외침을 통해 집회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집시법 11조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만들어졌다. ‘가만히 있으라’는 국가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기에 나온 결과다. 침묵을 강요하는 잘못된 법은 이제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집시법 11조는 삭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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