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거리의 만찬’은 지금까지 시사 프로그램이 가졌던 형식적 관성을 깬다. 시사 프로그램이라면 보통 중년 남성 앵커가 심각한 표정으로 사안을 정리해주거나 패널들이 찬반을 나눠 토론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혹은 진보와 보수 패널이 뒤엉켜 ‘정치 말싸움’을 하는 식이다.

거리의 만찬은 사건 당사자들이 직접 출연해 MC인 박미선, 이지혜와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거리의 만찬이 다루는 아이템도 여성 MC를 내세운 제작 방향과 어울린다. 지난해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던 거리의 만찬의 첫 손님은 복직투쟁을 해온 KTX 여성 해고 승무원들이었다. 지난해 11월 정규 편성이 된 후 ‘천개의 낙태’ 편(2회)에 임신 중단을 경험한 여성들을 초대했고 ‘엄마는 처음이라서’(4회) 편에서는 맘카페와 관련한 엄마들의 경험담을 전했다. 8~9화에서는 희귀중증질환을 가진 어린 환자들을 간병하는 엄마들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MC들과 자기 경험을 전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섞여 공감이 흐르고 눈물이 떨어지기도 한다.

▲ KBS1 '거리의 만찬' 2화.
▲ KBS1 '거리의 만찬' 2화.
8일 서울 영등포구 KBS 신관에서 만난 거리의 만찬 박상욱·이승문 PD는 기획안을 만들 당시부터 ‘여성 MC가 시사를 전하고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프로그램’을 생각했다. 이승문 PD는 “어떤 특별한 반응을 예상하고 MC를 섭외한 건 아니다. 많은 시사 프로그램 형식에 대한 반작용이었다”고 말했다. 박상욱 PD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고 보니 MC에 대한 시청자들 반응이 뜨거웠다. 많은 반성도 했다”고 덧붙였다.

형식만큼 내용도 파격적이었다. 지금까지 뉴스 프로그램 외에 보기 어려웠던 이들의 인터뷰가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16화 ‘언론에 당해봤어?’ 편은 언론 보도 피해를 입은 홍가혜씨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 등이 출연했다. 홍가혜씨나 황상기씨가 공영방송에 출연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장면은 낯설었다. 지난달 29일 방송된 19화에서는 고 장자연씨의 동료 윤지오씨가 지금까지 느낀 신변의 위협을 언급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 KBS1 '거리의 만찬' 방송 화면.
▲ KBS1 '거리의 만찬' 방송 화면.
이 때문에 “아예 편들어주는 프로그램”이라는 말도 나온다. 다른 한편에선 공영방송 KBS에서 다루기 힘든 아이템이라며 우려를 보내기도 한다. PD들의 생각은 어떨까.

“KBS 구성원들 각자 ‘공영방송’이라는 이름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것 같다. 한 프로그램에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기도 하다. 뒷짐지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모습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매체를 동시에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만 보고 사안을 판단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미디어에서 소외되는 목소리에 집중하는 게 ‘공영적’이라고 생각한다.”(이승문 PD)

“소위 ‘각’이 서지 않은 채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것. 이를 테면 명백하게 틀린 말인데도 중립을 지켜야한다며 반대 목소리를 키워주는 것. 그건 몸을 사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루는 이슈가 정치적으로 첨예한 이슈들은 아니어서 가능한 일이지만 시사 프로그램이라고 해서 찬반을 기계적으로 다루는 태도는 지양하려고 한다. 

우선 만날 분들은 자기 목소리를 전할 방법이 없던 사람들이다. 무조건 ‘중심의 한가운데’에 서는 게 아닌, 기울어진 무게중심을 옮길 수 있는 생각을 던지고 싶다.”(박상욱 PD)

▲ 8일 서울 영등포구 KBS 신관 사옥에서 박상욱, 이승문 PD가 앉아있다. 사진=정민경 기자
▲ 8일 서울 영등포구 KBS 신관 사옥에서 박상욱, 이승문 PD가 앉아있다. 사진=정민경 기자
제작자들은 이런 기획 의도를 잘 보여줄 수 있었던 에피소드로 임신중단을 다룬 2화를 꼽았다. 이 PD는 “기존 시사프로에서 ‘낙태죄’를 다룬 방식은, 초등학생 때 교실에서 했던 찬반 토론 같은 모습이 다수였다. 임신중단을 한 여성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들을 창구가 없었다”며 “보통 임신중단을 한 여성들을 모자이크하고 몇마디 인터뷰하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 PD는 “조급한 판단을 유예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고 말하고 싶다”고 전했다.

박 PD는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KBS 1TV가 전달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라고 강조했다. 박 PD는 “KBS 1TV라고 하면 기존 가치관을 확대 재생산하는 보수적 매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며 “‘KBS 1TV에서 이런 사안을 다루네?’라고 생각하는 시청자분들이 늘어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이템을 선정하는 과정은 PD들의 자율적 발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에게 ‘그리 하고 싶었으면서 지금까지 이런 아이템을 발제와 제작을 어떻게 참았느냐’고 질문을 던져봤다.

“그동안 시청자분들이 보시기에 많이 모자랄 수 있지만 관심과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16화에서 황상기 아버님과 이종란 노무사가 KBS ‘추적60분’에서 (삼성 백혈병) 취재를 많이 했다고 언급해주시기도 했다. 물론 지금까지 회사 일원으로서 답답했던 순간들, 굴종과 타협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제작자로서 가장 큰 고민은 만약 소위 ‘외압’이 사라진다면 정말 내가 알아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쉽게 말해 ‘나는 제작자로서 능력을 가지고 있나’라는 두려움이 가장 컸다. 부끄러운 고백이다.”(이승문 PD)

▲ 박상욱PD와 이승문PD. 사진=정민경 기자.
▲ 박상욱PD와 이승문PD. 사진=정민경 기자.

이 PD의 고민은 KBS가 제작 자율성을 확보한 지금 더 커지는 것 같이 보였다. 제작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과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시청률도 무시할 순 없다. 거리의 만찬의 경우 윤지오씨가 출현했던 19화가 최고 시청률 5%(닐슨코리아 기준)을 기록했다.

이 PD는 “을지로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는 평범한 이들을 다룬 ‘메이드인 을지로’편(14화) 같은 경우 개인적으로 만족도가 컸다. 그러나 다른 예능 등과 비교해 화제성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반인이 나오는 이야기, 실제 존재하는 우리 사회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보여주는 형식이 인기있는 시대가 지났을까 고민했다. ‘이런 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나는 그럼 어떡해야 할까’ 같은 고민으로 확대돼 감정적으로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출연진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이 PD는 “사실 연예인 입장에서 일반인과 접근해 이야기를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하는  프로그램을 부담스러워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용기를 내주는 출연진들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두 PD는 거리의 만찬이 방송 제작자들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상욱 PD는 “혹시나 사명감이나 정의감에 경도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가 있어야 할 곳, 다뤄야 할 것, 지금까지 다루지 못한 것을 제대로 다루는 데에 집중하려 한다. 제작자들이 서 있는 각자 영역에서 그에 걸맞은 프로그램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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