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이 71주년이 됐다. 대한민국 군경으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공비토벌이라는 구실로 제주도민 3만여명이 학살당했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 앞에 미군정과 국방부, 경찰은 그동안 공식 사과한 적이 없다.

국방부와 경찰은 3일 71년만에 공식 유감을 표명했다. 국방부는 관계자가 3일 오전 기자실을 방문해 제주 4·3사건 당시 희생된 제주도민들에게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했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서주석 국방부 차관이 이날 오후 중에 광화문 추모공간을 방문해 희생자에 애도를 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국방부는 “제주4·3특별법의 정신을 존중하며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에 깊은 유감과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국방부 관계자는 국방부의 4·3사건 입장표명을 두고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한 ‘제주4·3사건 특별법’을 정신을 존중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사죄나 사과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광화문에서 열린 4·3사건 71주년 추념식에 참석해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분들에게는 분명히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진실이 하나하나 밝혀지는 만큼 사실에 따라 경찰도 인정할 부분은 인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군과 경찰의 태도는 71년 만의 유감과 애도를 표했다는 것 외에 자신들이 71년 전에 어떻게 양민을 학살했는지를 인정하고 최소한의 반성과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로 보기 어렵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지난 2003년 12월 펴낸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를 보면, 군경 토벌대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사실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조선중앙일보 1949년 6월28일자를 보면, 제주도 당국의 발표를 토대로 1946년에 28만2942명이던 제주 인구가 1949년 5월1일 인구조사 결과 25만400명으로 줄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4·3진상조사단은 제주4·3사건으로 빚어진 인명피해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했다.

집중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있었다. 진상조사단은 이 때 벌어진 강경진압작전 때 대부분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지는 등 초토화됐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11월 중순 이전에는 주로 젊은 남성들이 희생된데 반해 강경진압작전 때에는 토벌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총살함으로써 제주4·3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이 때에 희생됐다”며 “본 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 통계를 보면, 15세 이하 전체 어린이 희생자 중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의 희생자가 76.5%를 차지하고 61세 이상 희생자 중에서는 이 기간에 76.6%가 희생됐다”고 기록했다.

▲ 민갑룡 경찰청장이 3일 오전 서울광장에서 제주4·3 제71주년을 맞아 열린 ‘4370+1 봄이 왐수다’ 추념식에 참석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민갑룡 경찰청장이 3일 오전 서울광장에서 제주4·3 제71주년을 맞아 열린 ‘4370+1 봄이 왐수다’ 추념식에 참석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가해자는 대부분 토벌대였다. 제주도의회 신고서에는 가해자로 토벌대가 84.0%, 무장대 11.1%으로 나타났다. 4·3위원회 신고에서는 토벌대 78.1%, 무장대 12.6%로 나타났다. 토벌대와 무장대 비율로만 산출하면, 제주도의회 신고서는 88.4% 대 11.6%, 4·3위원회 신고서는 86.1% 대 13.9%이다. 주한 미육군사령부의 제주도사건종합보고서도 주민들이 토벌대에 의해 80% 이상 사망했다고 보고한 것과 일치한다. 토벌대에는 경찰 군인 서북청년단, 자치경찰대, 응원경찰대 민보단 등이 포함됐다. 무장대는 유격대, 자위대, 인민군, 폭도, 공비, 괴한 등이 포함된다.

진상조사단은 “결국 2만~3만명에 이르는 무수히 많은 주민들이 대부분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었음을 알려준다. 더욱이 10%를 상회하는 노약자 무차별 살상은 4·3사건을 진압한 국가공권력의 인권유린 실태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고 썼다.

반면 군인 전사자의 경우 진상조사단은 180명 내외로 추정했고, 경찰관 희생자는 140명으로 파악했다. 토벌대가 가장 강하게 작전을 벌이던 시기에 경찰 희생자는 17명에 불과한 점을 들어 진상조사단은 “무장대와 상호 교전보다는 일방적인 토벌을 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평가했다.

1948년 12월부터 4월까지의 학살을 두고 진상조사단은 “진압군이 일부 중산간마을의 경우 소개령이 채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을을 덮쳐 가옥을 방화하고 주민들을 총살하기 시작했다. 일부 중산간마을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소개해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명이라도 사라졌다면 ‘도피자가족’이라 해 총살했다”고 설명했다.

군경의 무참한 민간인 살해의 배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진압 지시도 한몫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21일 국무회의에서 “미국 측에서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동정을 표하나 제주도, 전남사건의 여파를 완전히 발근색원(拔根塞源)하여야 그들의 원조는 적극화할 것이며 지방 토색(討索) 반도 및 절도 등 악당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여 법의 존엄을 표시할 것이 요청된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승만의 유족이나 후손, 그 주변의 누구도 이 같은 참혹한 역사에 사죄와 책임을 지지 않았다.

더욱 철저한 기록과 명예회복, 책임규명을 통해 다시는 이런 참혹한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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