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私)라는 한 글자는 나라를 망치는 근본입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점차 이런 풍조가 횡행하여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공정하지 못한 일을 있기 때문에 길거리나 마을마다 이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자자합니다. 그런데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상감께서 어떻게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1662년(현종 3) 6월10일자 대사성 서필원의 상소 중 일부분이다.

조선왕조 중반에 해당하는 인조~현종 연간의 17세기는 공론(公論) 중심의 사림정치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그 중심 기관은 삼사였다. 특히 홍문관은 옥당(玉堂)으로 불리면서 삼사 중에서도 언론은 물론 국가의 학술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가장 위상이 높았기에, 학문적인 실력은 물론이고 일신의 흠절도 일절 없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홍문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영광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출세를 보장했다.

홍문관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단,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야 했다. 홍문관원들이 문과급제자들 중에서 권점(圈點)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 대상을 추려서 ‘본관록(本館錄: 홍문록)’을 작성한 뒤, 의정부와 이조 당상 및 대제학 등이 참여해 또 다시 권점의 방식으로 합의를 거쳐 확정한 명단이 바로 도당록(都堂錄)인데 그것이 최종 명단이었다. 당시 정권의 실세들이 위치해있던 의정부 당상들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도당록에 선발된 인원은 거의 모두 홍문관원에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다른 관원들의 필수코스인 외직의 수령직을 대부분 거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국가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고 국정 운영을 직접 책임지는 정3품의 당상관으로 빨리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야말로 요직 중의 요직이 바로 홍문관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상관은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성균관 대상이었던 서필원은 본관록에 들지도 못했던 윤지미(尹趾美)와 원만리(元萬里)가 도당록에 들어간 이유가 재상들의 조카이자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사(私)라는 한 글자가 바로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라고 일갈했던 것이다. 윤지미는 영의정 정태화의 생질(甥姪)이었고, 원만리는 좌의정 원두표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이를 보고서 아무런 간쟁도 하지 않았던 사간원과 사헌부도 작심해 비판했다.

서필원의 상소는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일단 그 혐의의 당사자인 정태화와 원두표를 비롯해 도당록 권점에 참여한 대신들이 사직하는 상소를 했고, 뒤이어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료들의 사직 상소도 이어졌다. 거기에 당대 국가 원로였던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까지도 자신의 매부와 관련된 인사가 서필원의 비판을 받았다고 하면서 파직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 논쟁은 한 달 여 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현종은 정태화와 원두표를 변호하고서 처벌하지 않았다. 둘은 현종의 누이동생이었던 숙정공주(淑靜公主)와 숙경공주(淑敬公主)의 시아버지들이었다. 앞선 효종 말 이조판서에 임명되면서 효종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전권을 쥐게 된 송시열 등 산당(山黨)이 이제는 삼사를 비롯하여 판서직까지 진출, 조정 내에서 왕실 친인척 중심으로 구성된 한당(漢黨)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즉 현종의 자신의 왕권을 부지해줄 사람들이 다름 아닌 이들이었기 때문에 현종은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인과 서인의 입장이 반영된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의 서필원 졸기(卒記)에는 ‘성질이 거칠고 조급하며 고집하는 병통이 있다.’라고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는 당시 직언을 잘하는 다섯 명의 선비 중 한명이라는 ‘오직(五直)’이라고 그를 추앙 했다. 거칠고 조급할지라도 직언을 서슴치 않는 인사가 청와대 안에 있었다면 낙마가 예상된 인사들이 청문회에 나오거나, 일명 ‘성접대 의혹’으로 정국을 요동치게 하는 인사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최고 권력자가 직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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