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발생 25년. 여전히 의혹을 풀지 못한 ‘박준기 중사 사건’이 새 전기를 맞았다. 육군본부가 전직 중사 박준기(49)씨 측에 이 사건을 “민간수사기관에 고소하라”고 밝혔다.

박준기 중사 사건은 직업군인이던 박씨가 1994년 군 복무 중 의문의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미제 사건이다. 군은 박씨가 스스로 건물에서 몸을 던졌다고 결론 지었다. 당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군을 믿었다’던 박씨는 이듬해부터 차츰 기억이 돌아왔다. 박씨는 헌병대가 자신을 발로 차 계단에서 추락했다고 주장했다. 사고 때부터 국방부는 줄곧 수사절차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 박준기 전 중사. 박준호씨 제공.
▲ 박준기 전 중사. 박준호씨 제공.
복무 중 부당한 사고나 가혹행위를 겪은 군인 피해자가 만든 군상해·피해자모임과 육군본부 군고등검찰부 측 설명을 종합하면, 육군본부는 지난 3월7일 박준기 중사 사건을 재조사하라는 박준기씨 측 민원에 “김용화(가명)는 전역하여 현재 민간인으로 귀하께서 위 인원에 대한 처벌 등을 원하신다면 민간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제출해 주시기 바란다”고 회신했다. ‘김용화’는 박씨가 가해자로 지목한 당시 헌병수사관이다.

박씨는 처음 사건을 수사한 2군단 사령부와 육군수사단 등에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지난 2007년 국민권익위원회가 박씨 의견이 타당하다고 보고 군에 재조사를 권고했지만 군은 같은 결론을 냈다. 2009년엔 육군참모총장에게 장애보상금 지급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하고 춘천경찰서에 김용화씨 등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했지만 모두 기각됐다.

이후 2015년 한겨레가 이 사건을 보도한 뒤 국회 국방위원회가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부분만 재조사해 분명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군적폐청산위원회가 지난해 국민권익위에 재조사를 권고했다. 국민권익위는 ‘이미 한차례 재조사를 권고했으며, 수사권이 없는 행정기관이 추가 조사하기가 불가능하다’고 결론냈다. 형 준호씨는 “다양한 경로로 수없이 문제제기했지만, 군은 말이 곧 법이더라”며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 관련기사 : 한겨레 / ‘전직 중사’ 박준기의 돌아온 기억 “나는 자살을 기도하지 않았다” ]

1994년 12월17일 박씨는 24살이었다. 육군 2군단사령부 정보처에서 근무하던 그는 이날 밤 강원 춘천 시내에서 친구를 태우고 무면허로 차를 몰다 사고를 냈다. 박씨는 가벼운 상처를, 친구는 전치 8주 정도의 부상을 입어 인근 한림대 성심병원 병원으로 갔다. 박씨는 그 곳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다. 11일 뒤 깨어났지만 이전 4~5달 동안의 기억은 사라졌다.

헌병은 깨어난 박씨에게 ‘박 중사가 교통사고를 낸 데 가책을 느껴 10층 성당 창문으로 뛰어내렸다’고 했다. 교통사고는 밤 10시30분께 났고, 수위가 2시간 뒤인 12시30분께 추락한 그를 발견해 응급실로 옮겼다고 했다. 헌병은 이후 도착했다고 했다. 당시 박씨는 ‘기억 나지 않지만 군을 믿으므로 받아들인다’고 진술했다. 그는 이듬해 11월30일 ‘자의에 의한 상해’로 사상전역했다. 이후 사고로 인한 염증으로 양 다리를 절단했다. 최근엔 척추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으로 악물던 치아가 악화해 6개를 발치했다.

박씨는 현재 기억을 되찾았다고 말한다. 박씨 형 준호씨는 “특히 1996년, 2011년 다리를 절단한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이 돌아왔다”고 했다. 

박씨는 그날 10층 창문으로 뛰어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경찰에게 자신의 교통사고 사건을 인수하러 현장 출동한 헌병수사관 김용화씨가 병원 별관 2층 계단에서 박씨를 발로 차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교통사고는 늦어도 8시께 일어났고, 출동한 헌병수사관 2명의 얼굴과 나눈 이야기도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곧 결혼할 사람도 있었고, 교통사고를 내 친구를 다치게 했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전치 10주)”며 자살을 시도했을 리 없다고 했다.

2015년 12월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의 한 장면.
2015년 12월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의 한 장면.
군 수사자료에서 풀리지 않는 의혹은 크게 두 가지다. 교통사고와 경찰 출동 시점, 그리고 박씨의 창문 추락 여부다. 

군은 교통사고가 밤 10시30분에 일어났다고 발표했다. 박씨 측은 가해자로 지목된 헌병수사관 김용화씨와 손일국씨(가명)가 교통사고 시점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헌병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출동했는데, 김씨와 손씨가 ‘박씨 추락 전에 도착하지 않아 그와 접촉한 적 없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라고 추정한다.

박씨의 친구 김내창(가명)씨는 당시 헌병의 조사 과정에서 ‘교통사고는 8시30분 이전에 일어났다’고 진술했다고 밝혀왔다. “당시 전신마취 척추수술을 받은 뒤 깨어난 상태라 헌병이 내 말을 받아적었다. 왜 사고 시점을 10시30분으로 기록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당시 박씨 신고를 받고 최초로 출동한 춘천경찰서 최아무개 당시 경장도 국민권익위원회 조사에서 현지에 9시30분 출동했다고 밝힌 바 있다.

둘째 의혹은 박씨가 창문을 통과했는지 여부다. 군 수사결과에 따르면 박씨는 10층 성당의 반개방식 창문(손잡이를 앞뒤로 밀고 당겨 문이 조금만 열리도록 한 창)을 통해 추락했다. 이는 창문에 있는 방충망을 찢어야 가능한 얘기다. 그런데 군이 수사자료로 찍은 창문사진엔 박씨 몸통이 빠져나간 방충망 구멍을 찾아볼 수 없다. 국민권익위도 재조사를 권고할 때 방충망이 ‘미훼손’ 상태라고 판단했다.

방충망이 찢어져 있었다는 진술도 한차례 번복됐다. 방충망이 찢어졌다고 진술해온 경비원 홍아무개씨는 지난 2007년 국민권익위 조사에선 창문의 방충망이 찢기지 않고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홍씨는 다시 말을 바꿨다.
▲ 위는 군이 박씨가 추락했다고 결론내린 10층 성당 현장모습. 아래는 군이 박씨가 추락했다고 결론내린 지점에 피가 흥건한 모습. 사진=군 수사자료. 박준호씨 제공
▲ 위는 군이 박씨가 추락했다고 결론내린 10층 성당 현장모습. 아래는 군이 박씨가 추락했다고 결론내린 지점에 피가 흥건한 모습. 사진=군 수사자료. 박준호씨 제공

군이 자살기도 근거로 삼은 수사자료는 엉성했다. 초동수사 자료는 박씨가 추락할 때 통과했다는 창문과 박씨가 추락했다는 지점의 사진, 함께 차에 탄 친구 김아무개씨와 병원 경비원 홍씨 진술 등이다. 

그런데 병원기록을 보면 박씨는 당시 머리를 다치지 않은 “정상 상태”였다. 떨어져 있는 박씨를 목격한 응급실 당직 의사도 군이 주장하는 곳과 14m 떨어진 지점에서 그를 발견했다고 지목했다. 박씨가 창문에서 추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주장이지만, 군은 의사를 조사하지 않았다. 지문과 혈흔 등도 조사하지 않았다. 

4년 전 언론이 박준기 중사 사건에서 가장 주목한 쟁점은 창문 폭이었다. 군이 말한 21cm 폭의 열린 틈새로 당시 건장했던 박씨가 통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한겨레가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의혹을 보도한 이후 SBS 등 언론과 진성준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이 집중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후 2016년 진성준 의원실과 한림성심병원, 국방부, 박준기씨 측이 참석한 가운데 실험을 진행했고, 박씨 체격으로 21cm 너비의 틈을 통과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군은 초동수사 이후 창문 개방 폭을 24cm, 30cm 등으로 번복한 바 있다. 한편 창문 수리기사는 사건 당시 해당 창문 폭을 12cm로 좁게 설정해뒀다고 한겨레에 밝히기도 했다.

박씨는 최근 육군본부 회신이 사건의 의문을 풀 실마리라고 보고 있다. 육군본부 고등검찰부는 미디어오늘에 “사건 관계자들이 모두 민간인 신분이 됐으므로 민간 쪽으로 재수사를 의뢰하란 취지로 회신했다”고 밝혔다. 다만 육군본부는 “위 사건의 경우 귀하(박씨 어머니 김아무개씨)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공소시효가 완성돼 처벌 등이 제한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군피해‧상해자모임은 오는 4일 청와대 앞에서 박준기 중사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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