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15일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에 출연해 자신을 “1980년 5월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이라고 주장한 김명국(가명)씨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하다. 

김명국씨와 30여 차례 만나 논픽션 ‘보랏빛호수’를 썼다는 탈북자 이주성씨에게 김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나 거절당했고, 김씨를 직접 만났던 김광현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전화를 걸어 미디어오늘 기자라고 밝히는 순간 전화를 끊어버렸다. 김씨를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도움을 얻을 길이 없다. 

▲ 2013년 5월15일자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의 한 장면. 맨 왼쪽 모자이크 처리된 이가 김명국(가명)씨다. 가운데 얼굴을 드러낸 이가 김광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다. ⓒ채널A화면 갈무리
▲ 2013년 5월15일자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의 한 장면. 맨 왼쪽 모자이크 처리된 이가 김명국(가명)씨다. 가운데 얼굴을 드러낸 이가 김광현 동아일보 논설위원이다. ⓒ채널A화면 갈무리

이주성씨가 김명국씨를 만나서 썼다는 ‘보랏빛호수’란 책의 부제는 ‘광주사태 당시 남파되었던 한 탈북군인의 5·18 체험담’이다. 주인공은 정순성이다. 월간조선은 “김명국과 정순성이 동일인물이거나 동일한 작전에 참여한 인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는데 동일인물로 봐도 된다. 책에 따르면 정순성은 1976년 군에 입대해 대남간첩훈련을 받아 1980년 5·18 광주에 남파됐다. 정순성이 1010군부대 소속이었고, 1980년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5월19일 황해남도의 한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 정순성과 50여명의 군인들은 5월21일 밤 12시경 전라남도 바닷가 부근에 도착한다. 이후 5시간 넘게 걸어 광주에 도착한다. 책에는 광주에 남파된 인민군 특수부대가 아시아자동차공장과 무기고와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적혀있다. 이들이 국군과 시민을 사격해 ‘폭동’을 조장했다는 거다. 파견대장 문제심의 호위 임무를 맡았던 정순성은 5월27일 오전 9시 철수명령을 받았고, 철수과정에서 국군과 교전을 벌인다.

이들은 걸어서 북에 간다. 지리산을 거쳐 태백산 줄기를 타고 6월2일 휴전선 부근에 도착한 뒤 땅을 파서 휴전선을 통과, 6월3일 북한에 도착한다. 정순성은 자신들을 국군으로 오인한 북한군의 포격으로 허벅지에 포탄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 ‘019번’이란 이름으로 광주에 다녀왔다는 정순성은 북한에서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문제심은 2006년 당시 인민무력부 부부장(국방부 차관급)까지 출세했다고 한다.

책에는 정순성이 탈북한 뒤 한국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5·18 광주폭동이 김일성의 명령에 의해 조직되고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썼다”고 적혀있다. 책에 등장하는 정순성은 2013년 5월15일 채널A ‘김광현의 탕탕평평’ 방송에서 이주성씨가 설명한 김명국씨와 거의 일치한다. 

해당 방송에서 이씨는 “김명국씨가 2006년 가을에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주성씨 역시 2006년 탈북, 한국에 정착했다.

이주성씨는 이날 진행자 김광현씨에게 이렇게 말한다. “특수부대 훈련 교관이었는데 훈련과정에 (김광현) 부장님도 보셨다시피 손이 다 잘렸다.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포탄을 맞아 다리에도 부상을 당했다. (이후) 훈련과정에서 심하게 다쳐서 손이 절단됐다.” 이에 비춰보면 김명국씨는 손이 불편하거나, 또는 의수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 쪽 다리도 불편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는 이런 단서를 바탕으로 탈북민들을 통해 수소문하는 수밖에 없다.

▲ 김명국(가명)씨를 찾습니다. 디자인=이우림 기자.
▲ 김명국(가명)씨를 찾습니다. 디자인=이우림 기자.
운 좋게 몇몇 탈북민과 연락이 닿고 있다. 탈북민 ㅈ씨는 “남쪽에서 만난 사람 중 1980년 광주에 다녀왔다고 말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찾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ㅈ씨는 탈북민들이 출연하는 채널A ‘이제 만나러갑니다’와 TV조선 ‘모란봉클럽’ 등을 가리켜 “이북사람 나온다고 해서 몇 번 봤는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많이 해서 채널을 돌렸다. 방송국에서 만든 각본대로 말한다고 들었다. 돈을 주니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다”라면서 “김명국씨도 돈을 받고 말해줬을 것”이라고 했다.

20년 전 北보위부 공작원, ‘5·18북한군 침투설’을 말하다

김명국씨를 찾기 위한 취재과정에서 알게 된 ㅇ씨는 20년 전 북한군 보위사령부 소속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첩’이었다. 그는 미디어오늘에 “나는 북한 보위사령부에서 교육을 받았고, 실제 남파된 적도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뒤 “광주에 북한군이 침투됐을 리가 없다”며 ‘5·18북한군 침투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ㅇ씨는 “김일성이 1980년 광주 때 ‘우리가 개입했더라면, 잘 하면 통일될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쉽다’는 식의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ㅇ씨는 2003년 경 한국에 정착했다. 그는 “한국에 있는 탈북민 2만5000명 중 최소 1만 명 이상은 남자다. 북한남자는 대부분 군대를 갔다 온다. 그럼 상식적으로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는 사람이 (남쪽에서) 수백 명은 돼야 정상이다”라고 말하며 일부의 북한군 개입 주장에 대해 “누구 사주를 받고 돈 받고 하는 얘기”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는 “탈북민들이 푼돈에 이용당하는 게 있다”며 “언론에서 탈북민들이 돈에 이용당하는 내용을 취재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2013년 당시 방송에서 “국정원 합동신문에서 (탈북민들이) 5·18문제를 거론하면 사회를 혼란시키지 말고 입 다물라는 협박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발설하지 않겠다는 보안각서를 쓴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서석구 변호사)라는 주장에도 ㅇ씨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광주를 모욕하는 일부 탈북민 때문에 남쪽 사람들이 대다수 탈북민을 이상하게 본다. 그런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 탈북민 네트워크에선 상대도 안 한다. 인간 취급도 안 한다”고 강조하며 언론을 향해 “극소수가 하는 말을 가지고, 전체 탈북민이 모두 그렇게 바라본다는 식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는 미디어오늘이 김명국씨를 찾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미디어오늘은 김명국씨를 찾기 위해 앞서 두 번의 기사를 썼다. 2018년 9월26일자 “1980년 광주에 있었다는 북한군 김명국씨를 찾습니다”란 기사와, 2019년 2월25일자 “1980년 광주 갔다는 북한군 김명국씨, 빨리 연락주세요”란 기사다. 김씨를 찾아 5·18북한군 침투설을 둘러싼 소모적 갈등을 끝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전히 김씨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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