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1982년 9월10일 1면 머리에 ‘범인은 따로 있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살인 혐의로 2심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며 14개월째 옥살이 하던 김시훈씨(30)가 범인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최아무개씨가 1981년 6월24일 밤 11시30분께 전주시 효자동 고갯길에서 칼에 찔리고 밧줄로 목이 죄어 살해됐다. 경찰은 18일만인 7월12일 전주대 신축공사장 노동자였던 김씨를 연행해 범인이라고 발표했다. 1심은 범행을 극구 부인하는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은 김씨에게 15년형을 선고했다.

가난한 노동자였던 김씨는 1,2심 모두 변호사 없이 홀로 소송에 나섰고 14개월째 수감생활하다가 진범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 1982년 9월10일 동아일보 1면.
▲ 1982년 9월10일 동아일보 1면.
경찰은 다른 사건 피의자를 수사하다가 전주 살인사건 자백을 받아 냈다. 동아일보는 1면 머리로 특종기사를 내보낸 다음날 ‘억울한 범인과 진범’이란 제목의 사설도 썼다. 김중배 동아일보 논설위원도 그날 3면에 당시 인기 있던 ‘그게 그렇지요’란 문패의 칼럼을 ‘유죄인 무죄인’이란 제목으로 썼다. 미국의 명 판사 프랭크가 죽기 이틀 전에 탈고한 같은 이름의 오심 연구서에서 따왔다.

김중배 논설위원은 이 칼럼에서 희대의 바람둥이 박인수 사건 1심 재판에서 고 권순영 판사가 남긴 “법은 보호할 가치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판결 문구도 언급했다.

조갑제씨가 편집장으로 있던 월간 ‘마당’은 1982년 10월호에 동아일보의 특종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동아일보가 강조한 ‘진범’이란 말을 짚었다. 동아일보가 ‘진범’이라고 지칭한 권아무개군(18) 등 세 사람은 아직 1심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권군 등이 범인인 게 확실해도 법원 판결 전에 언론이 먼저 ‘진범’이라고 지상 판결할 권리는 없다.

월간 ‘마당’은 언론을 향해 왜 그토록 서둘러 ‘진범’ 못박기를 즐기느냐고 힐난했다. 언론의 성화에 못 이긴 경찰이 범인 잡는 기간을 단축시키려고 무리한 수사할 가능성도 높다. 당시 언론은 살인사건이 나면 몇 주일도 못 기다려 ‘경찰의 무능’을 들볶고, 경찰이 피의자를 확보하면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진범으로 확정하기 일쑤였다. 때문에 고숙종씨나 정재파군처럼 지면과 사진, 화면으로 무수한 증오와 욕설과 모독의 융단폭격을 당했던 범인들이 법정에서 무죄로 풀려난 일도 적지 않았다.

어설픈 단정 만큼 위험한 보도는 없다. 하나하나의 사실을 모아 합리적 의심을 켜켜이 쌓아가는 게 언론의 정석이다. 최근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의 성접대 의혹사건이 재조명 되면서 법무부와 검찰이 재수사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온다. 여야 3당은 김학의 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당시 황교안 법무부장관과 곽상도 민정수석이 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 2015년 6월18일 오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접견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15년 6월18일 오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후 접견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법무부에 황교안 장관과 김학의 차관이 선임된 건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 초기였다. 곽상도 당시 수석이 인사검증을 소홀히 한 걸 묵과할 순 없다. 그런데 실제 인사검증 실무는 민정수석실 공직기강비서관 일이다. 거기엔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일했다. 조 의원은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까지 요직을 두루 맡았다. 당시 검찰총장은 채동욱이었다.

그래서 시중엔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 사건이 아무리 돌려도 터지지 않을 폭탄이란 얘기도 나온다. 검찰은 지금도 김학의 전 차관의 성 비위보단 뇌물수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번에도 돌리다가 조용히 내려놓으면 만사형통이란 식으로 접근하면 검찰은 영원히 ‘떡검, 색검’이란 꼬리표를 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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