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는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근접하고 식민지의 역사를 겪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신남방정책을 통해 한국의 새로운 경제적 동반자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한국 국민에게 이들 나라들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가기 쉬운 해외여행지 정도로 인식되고 관광정보만 공유되는 실정이다. 이에 자유언론실천재단과 미디어오늘은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아세안(ASEAN) 이웃국가들의 언론 상황과 탄압 실태, 진실 보도와 자유언론 수호를 위한 현지 언론인들의 활동을 취재한 기록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연재의 내용은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기획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8년 12월에 발간한 책 ‘우리는 말하고 싶다 : 현장 르포, 분투하는 아시아의 자유언론(박성현·김춘효 지음, 이루 펴냄)’을 토대로 요약, 보완한 것이다. -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01) 낯선 이웃 아세안, 분투하는 자유언론
02) 진실 보도에 목숨을 걸다, 필리핀 언론인의 현실
03) 태동하는 언론의 자유, 베트남의 시민언론
04) 언론탄압으로 퇴색한 미얀마의 민주화
05) 새 시대의 길목에 서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언론
말레이시아 국민에게 2018년 5월9일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래 무려 61년간 집권해 온 여당연합 ‘국민전선’(바리산 나시오날, BN)이 총선에서 패배함으로써 야당연합 ‘희망연대’(파카탄 하라판, PH)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선거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평화로운 촛불시위로 국정농단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듯이, 말레이시아 국민은 수차례의 실패 끝에 마침내 선거를 통한 평화로운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의 ‘촛불시민혁명’이 완성되려면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아있듯이,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뤄낸 말레이시아가 민주주의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개혁 과제들이 많고 갈 길이 멀다.
정치 세력의 언론 장악과 통제
말레이시아 인구의 60%는 말레이인과 다른 토착민들이고, 30%는 중국인, 8%는 인도인이며, 나머지 2%는 기타에 속한다. 이에 따라 종교도 이슬람, 불교, 힌두교 등이 공존한다. 말레이시아 사회의 다인종·다문화적 특성은 정당 구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말레이인 대상의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 이하 ‘암노’로 지칭), 중국인 정당인 ‘말레이시아중국인협회’(MCA), 인도인 정당인 ‘말레이시아인도인회의’(MIC)가 손을 잡은 국민전선(BN)은 2018년 5월 총선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집권세력인 여당연합이었다. 그런데 지난 61년간 정권을 유지한 국민전선의 세 당이 각각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것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이들이 집권세력으로서는 서로 다른 인종집단과 동맹을 맺어 하나임을 강조하지만, 각자의 기반 지지층에 가서는 인종적·종교적 갈등과 분쟁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언론사들은 대부분 그 소유권이 정당들에 있다. 정당들은 자신이 소유한 언론매체의 편집권을 통제하고 이 매체들은 정권의 대변인 구실을 해왔다. 구 여당연합 국민전선이 주요 일간지들과 지상파 방송 등 미디어를 장악해 통제한 것은 말레이시아 내 언론의 자유를 방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어일간지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New Straits Times)를 소유한 ‘미디어 프리마’(Media Prima)는 정부 투자 미디어기업으로, 미디어 프리마의 최대 주주는 암노(국민전선의 대표 정당)이다. 말레이어 신문인 ‘우투산 말레이시아’(Utusan Malaysia)의 최대 주주도 암노이다. 암노는 말레이 언론 그룹 우투산과 ‘뉴 스트레이츠 타임스’를 2002년에 통합했다. 공영 방송인 TV1과 TV2, 민영 방송인 TV3, TV7, TV8, TV9, 그리고 라디오의 말레이어 채널 ‘핫 에프엠’(Hot FM) 역시 암노의 미디어 프리마가 최대 주주로 있다. 영어 일간지 ‘스타’(The Star)와 중국어 신문 ‘남양상보’(南洋商报)는 국민전선의 중국 정당 MCA의 소유이고, 타밀어 일간지인 ‘타밀 네산’(Tamil Nesan)은 국민전선의 인도 정당 MIC의 소유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볼 때, 구 여당연합이 지난 61년 동안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집권당에 의한 총체적인 미디어 장악과 언론 통제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언론매체의 사업허가를 매년 심사하는 것을 비롯해, 언론 관련 여러 악법들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말살해 온 것에도 기인한다. 선거 때마다 여당의 선전과 정보만 듣고 일방적으로 선거 패배를 당해야 했던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인터넷에서 새로운 정보를 찾고 언로를 모색한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2018년 총선 승리에서 나집 전 총리의 1MDB 스캔들*이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탄압 속에서 오랫동안 민주적 개혁을 위해 활동한 독립언론과 시민사회의 노력이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1MDB(말레이시아개발유한회사)는 2009년 나집 총리가 국내외 자본을 유치해 경제개발 사업을 한다는 목적으로 설립한 말레이시아의 국영투자회사로, 나집 전 총리는 측근들과 함께 1MDB에서 45억 달러(현재 환율 기준 약 5조1천43억원)가 넘는 자금을 횡령해 현재 기소되어 있다.]
구정권의 탄압을 많이 받아 온 온라인뉴스매체 말레이시아키니(Malaysiakini, ‘Malaysia Today’의 뜻)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독립언론이다. 말레이시아키니는 인종·언어·종교·문화가 상이한 말레이시아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을 끌어안기 위해 영어·말레이어(Bahasa)·중국어·타밀어의 4개 언어로 뉴스를 발간한다. 1999년 학생운동가 출신 두 명에 의해 설립된 이 매체는 설립 당시 4명으로 시작해 직원 90명의 지금과 같은 성장을 이룩했다. 초창기에는 해외의 지원도 있었지만, 이들이 성장한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지지 그리고 시민과의 소통이 놓여 있다. 당시 집권세력의 통제를 받는 주류언론을 불신하던 시민들이 인터넷상의 대안언론으로 눈을 돌렸고 말레이시아키니의 사실보도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스티븐 간 편집장의 다음 말은 말레이시아키니가 탄압을 받을 때마다 힘이 되어 준 시민들이 이 매체의 동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지난 19년 동안 정부의 불시 급습을 다섯 차례 이상 당했다. 2003년이 제일 컸는데, 경찰이 와서 19개의 컴퓨터와 모든 하드웨어를 가져갔다. 우리는 컴퓨터를 다 잃었는데, 이때 외부의 지원이 많았다. 사람들이 사무실로 와서 컴퓨터를 기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한 남자는 큰 데스크톱을 가져와서 ‘이건 내 딸 건데 그 애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이걸 쓰세요. 그리고 나중에 돌려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받을 수 없으니 딸에게 돌려주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정말 많이 지원했다. 그렇게 우리가 살아남았다.”(스티븐 간, 말레이시아키니 공동설립자 겸 편집장)
언론의 자유를 가로막는 악법 철폐의 길
2018년 9월, 말레이시아 상원(원로원)은 하원(대의원)이 8월에 통과시킨 가짜뉴스방지법 폐지 법안을 거부했다(참고로, 책 ‘우리는 말하고 싶다…’ 261쪽에서 ‘폐지되었다’고 언급한 것은 8월 상황에 근거한 것으로 이 기회에 바로 잡는다). 가짜뉴스방지법은 2018년 5월 총선을 눈앞에 두고 4월에 제정되어 실행된 악법으로, 당시 여당연합이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쓴 언론인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법 외에 말레이시아에서 언론인과 직접적 연관이 있는 법으로는 영국 식민지 시절 인쇄법령(1948)에 뿌리를 둔 인쇄언론출판법과 1998년에 만들어진 통신멀티미디어법이 있다. 그 밖에도, 역시 식민지 시절의 유산인 선동법, 공직기밀법, 국가보안법이 언론탄압에 종종 사용되어 왔다. 말레이시아는 현재 ‘미디어협의회’(Media Council)를 구성 중이다. 현지 언론의 보도에 의하면 이 조직을 완성하는데 몇 달이 걸릴 예정이어서, 선동법이나 인쇄언론출판법 등 새 정부가 약속한 여러 악법의 폐지 또는 개정을 보려면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앞으로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
독립 이래 61년 만에 처음으로 이루어진 말레이시아의 정권교체는, 버시2.0의 사무국장 얍 스위 셍이 말하듯이, “종교·인종·민족·언어·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부패하고 억압적인 권력에 대항해 결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얍 스위 셍은 그러나 “우리의 예전 친구이자 동맹이었던 새 정부에 대해 우리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개혁들을 잘 수행하는지 감시하고 점검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역사적인 전환점에 서 있는 말레이시아의 국민들은 ‘말레이시아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로 ‘뉴 말레이시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뉴 말레이시아’의 구현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대에 못지않게 그것이 또한 매우 어려운 과제임을 잘 알기에 말레이시아의 시민사회단체들과 독립언론매체들은 더욱 철저하게 비판자와 감시자의 역할을 각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