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수석대변인. 한주 내내 달궜던 문제의 그 단어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고 하자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을 최초 썼던 블룸버그 소속 기자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이 블룸버그 기자를 정면 겨냥한 논평을 내면서 정치권과 언론의 갈등으로 격화되는 모양새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나경원 원내대표를 비판하는 내용에 방점을 찍었다고 하지만 “국내 언론사에 근무하다 블룸버그 통신리포터로 채용된 지 얼마되지 않아 그 문제의 기사를 게재했다”거나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비난했다. 사실상 블룸버그 기자를 국내언론사에서 근무하다가 외국 매체의 한낱 통신리포터가 돼서 자국 대통령을 비난한 한국인으로 낙인찍었다고 해도 무방한 내용이다.

민주당 논평은 크게 두 가지 오류가 있다. 블룸버그 소속 기자를 온전히 저널리스트로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표현을 쓴 블룸버그 측의 입장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공식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던 블룸버그 통신 대변인이 18일(현지시간) “블룸버그는 보도 기자와 기자를 존중하며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자사 소속 한국인 저널리스트를 비하하는 내용의 논평에 대한 대응의 성격이 강하다.

해당 기자는 블룸버그 통신 한국주재 기자로서 남북관계나 북미관계 전반을 취재하고 있다. 일례로 그는 지난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고 긴박하게 북한의 최선희 부상 기자회견이 열렸을 때 현장을 취재했다. 블룸버그 타이틀을 달고 기사를 쓰는 다른 기자와 해당 기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국주재 통신리포터라느니 하는 비난은 논란의 본질에서 한참 빗나간 얘기다.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표현을 과연 문재인 대통령을 폄훼하기 위한 목적에서 블룸버그가 타이틀로 달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정작 블룸버그 기사 내용 안에는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이 전혀 안 나오는데 제목에 쓴 것은 악의적 목적에 따른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은 북미관계의 중재자로서 역할이 강조될 때였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북한이 정상 국가 이미지를 구축하고 국제사회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블룸버그 기사는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유엔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뜻을 적극 알렸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말한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과 블룸버그 기사에 나온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은 맥락상 다를 수 있는데 이를 동일시하고 기자까지 비난하면서 이번 논란이 커졌다는 것이다.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을 악마화하면서 나경원 원내대표의 프레임에 갇혔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민주당이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표현에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남북미 관계 발전을 위해서라면 누구도 대변할 수 있다고 호기(豪氣)를 보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다.

▲ 블룸버그의 지난해 9월26일 기사 화면 캡쳐.
▲ 블룸버그의 지난해 9월26일 기사 화면 캡쳐.

물론, 블룸버그 기사 맥락을 살펴보더라도 김정은 대변인이라는 표현을 제목으로 쓴 것은 과하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해식 대변인의 말처럼 “기사도 논평 대상”이 될 수 있고 해석도 자유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룸버그 기자가 “매국에 가까운 내용”을 썼다거나 “검은머리 외신기자”라고 비하하는 순간 논점이 이탈해버렸다. ‘김정은 대변인이 됐다’라는 기사를 한국주재 외국인 기자가 썼다라고 가정해보면 간단한 일이다.

서울주재 한 외신기자는 “지난해 9월 블룸버그 기사가 나왔을 때 김정은 대변인 표현을 두고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당연하다. 그런 표현을 놓고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자 역할에 충실했다고 이해할지 아니면 과잉됐다고 볼지 논평할 수 있다. 기사의 문제적 표현에 반응하는 것도 기자의 숙명이다. 그런데 인격적으로 매국 행위를 했다느니 검은머리 외신이라고 인종차별적 용어를 쓴 것은 대단히 큰 문제”라고 말했다.

외신기자는 “과거 정부 때도 자신들에 불리한 외신 기사가 나오고 기사를 쓴 사람이 한국인이면 검은머리 외신이라고 비난했다. 항상 그랬다. 정당 정치인들이 아젠다를 세우기 위해 외신기사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상대방을 공격하면 상대방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검은머리 운운하면서 기자를 공격해 방어한다. 박근혜 정부 때도 똑같았다”며 “단지 놀라운 것은 촛불혁명으로 탄생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던 문재인 정권에서 자신들이 우려했던 잘못된 관행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외신기자는 “블룸버그 기자를 무슨 한국주재 통신리포터라면서 깎아내리고 외신의 눈으로 본 보도가 아니라고 하는데 해당 기자는 블룸버그 다른 기자와 아무 차이가 없다. 한국주재 외신특파원은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외국에 보도하는 것이다. 한국에 있는 외신발 기사는 대부분 한국인이 쓴다.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민주당 논리대로라면 한국에 있는 금발기자가 한반도 기사를 쓰거나 아니면 워싱턴에 앉아서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고 꼬집었다.

현재 한국주재 외신기자들은 과거 정부 어느때보다 문재인 정부 정책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평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가 외신과의 접촉을 활발히 하고 있는 이유다. 문 대통령을 단독 인터뷰한 매체는 국내 매체가 아닌 외신이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이 문재인 정부와 외신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반환점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당장 청와대 출입 외신기자의 공식 소통 창구에서 외신 대변인에게 이번 논란에 대한 청와대의 공식 입장을 요구하는 질의가 쏟아졌다고 한다. 항의성 차원의 질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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