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2월5일 공군 수송기가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해 탑승한 장병 53명이 모두 숨졌다. 같은 해 6월1일 낮 2시40분에도 훈련하던 공군 수송기가 경기도 성남 부근 야산에 추락해 탑승한 장병 53명이 숨졌다.

2월5일과 6월1일 사고 비행기는 모두 C123기종이었다. 둘 다 악천후였고, 숨진 장병도 53명씩 같았다. C123기는 2차대전 말에 미국이 개발을 시작해 1954년부터 실전 배치됐고 1962년엔 미 공군 주력 전술 수송기가 됐다. 주로 월남전에서 병력과 장비 수송, 고엽제 살포를 담당했다.

▲ 1982년 2월5일 발생한 공군 수송기 C123기 사고기에 탑승했던 장병들의 생전 훈련 장면.
▲ 1982년 2월5일 발생한 공군 수송기 C123기 사고기에 탑승했던 장병들의 생전 훈련 장면.
그러나 이 기종이 산악이 많아 계곡을 따라 돌풍이 많이 부는 한반도 기후에 맞는지는 검증이 필요했다.

제주 추락기에는 당시 제주를 연두 순시하는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해 이른바 ‘봉황새작전’을 펴던 특전사 대원들이 탔다. 53명 사망은 한국전쟁을 뺀 평시 작전 중 국내 최대 사망자다. 천암함 사건 때보다 6명이 더 숨졌지만 정부와 군 당국은 여전히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당시 정부는 “대간첩 침투작전을 벌이던 중 사망했다”고 엉터리 발표했지만 유족들은 지금도 “전두환 경호를 위해 악천후에도 무리하게 제주 봉황새작전을 수행하다 추락했다”고 주장한다. 봉황새작전의 진실은 30년 넘도록 은폐돼 있다.

[ 관련기사 : 제주의소리) 특전사 53명 목숨 앗아간 작전명 ‘봉황새작전’ ]

넉달 간격으로 같은 기종의 수송기가 합쳐서 106명의 장병을 죽음으로 내몰자 동아일보는 사설로 “4개월 만에 추락사고를 또 당했다는 것은 단순한 불운으로 돌리기는 어렵다”고 썼다.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초기임에도 사설로 정부에 원인조사와 재발방지책을 요구한 언론은 동아일보 뿐이었다.

1971년 2월 일본 삿포로에서 열린 동계 프레올림픽에 파견 나간 한국 기자들은 일제히 북한 한필화 선수가 남한 김영희 선수의 이모라고 보도했다. 두 선수는 스피드 스케이트 장거리 선수였다. 우리 신문은 1면과 사회면에 ‘단장(斷腸)의 레이스’, ‘이모는 나를 몰랐다’, ‘불러보고 싶었지만’ 같은 감상적 제목을 담아 취재에 열을 올렸다.

중앙일보가 제일 심했다. 중앙일보는 2월6일 김영희 선수의 어머니 한계화씨를 편집국으로 불러내 일본 현지의 딸과 국제전화 통화를 하게 했다. 중앙일보는 한계화씨가 “그저 꿈만 같습니다”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잘 잇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이후 거의 모든 신문이 두 선수가 혈육이라고 못박았다. 북한 한필화 선수는 “고향이 다르다. 나는 본적이 남포이고, 한계화는 함흥”이라며 부인했는데 우리 언론은 “딱 잡아떼며 핏줄마저 끊으려는 북괴의 근성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한계화씨는 동생을 만난다며 일본으로 날아갔다.

▲ 1971년 02월06일 중앙일보 1면
▲ 1971년 02월06일 중앙일보 1면
이틀 뒤 동아일보가 혼돈을 한 방에 정리했다. 동아일보는 “한필성(당시 38)가 북한 한필화 선수가 말한 나이, 고향, 가족관계, 신체 특징에 근거해 자기 동생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2월17일 동아일보 보도에 근거해 한국의 한필성과 북한 한필화 선수를 국제전화로 연결했다. 두 사람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봤다. 동아일보의 승리였다.

이렇듯 과거 권위주의 시절 북한 관련 보도는 늘 관성에 의존했다. 한 방 크게 치면 되돌아보지 않고 질주하기 십상이었다. 우리 언론 대부분은 북한 한필화 선수의 부인에도 한계화씨 말만 믿고 ‘혈육’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1971년 한계화-한필화 자매 둔갑 보도 이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우리 언론의 북한 보도는 여전히 믿거나 말거나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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