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설 연휴를 앞두고 경기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에서 구제역이 발생했지만, 민·관의 노력으로 전국적인 확산을 막아냈다. 이제 구제역은 우리 국민 모두 재난으로 인식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구제역과 비슷한 기록이 제법 있다. 당시에는 소의 전염병을 ‘우역(牛疫)’이라고 했다. 우역이 처음 실록에 등장한 것은 중종 36년(1541)이다.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소들 대부분이 우역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이후 선조 때까지는 우역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적다. 그렇다고 해서 우역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유는, 백성들이 우역이 발생했다고 관아에 보고하면, 관아에서는 소의 힘줄을 보여 증명하라고 했기 때문에 조정에 보고되는 것은 1/5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 지난 1월30일 경기도 안성 한우농가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가운데 대전 서구청 축정팀 관계자가 관내 사육 중인 한우에 구제역 백신 주사를 놓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1월30일 경기도 안성 한우농가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가운데 대전 서구청 축정팀 관계자가 관내 사육 중인 한우에 구제역 백신 주사를 놓고 있다. ⓒ 연합뉴스
우역이 자주 발생한 때는 17세기 중·후반인 현종과 숙종 연간이다. 현종 4년(1663)에는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등 전국에 걸쳐 우역이 발생했다. 경상도에는 6천 4백여 마리, 전라도에는 1천 3백여 마리, 황해도와 강원도는 각각 1천여 마리 이상의 소들이 우역으로 죽었다. 1680년(숙종 6)에서 1686년(숙종 12)까지는 거의 매년 우역이 발생하여 도합 수 만 마리 이상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정 대신들은 소의 도축을 전면 금지하자고 했다. 숙종 때 노론의 거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쇠고기를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것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여긴다. 지금 도축을 금지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농사철에 농사를 짓지 못하는 재난이 가뭄보다 심할 것이다.(초략 번역)” 소가 남아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도축해서 먹을 생각만 하는 어리석은 행태에 대한 비판이다.

우역이 심했던 현종 때의 일이다. 당시 병조판서로서 약방제조(藥房提調)를 겸직하고 있던 현종의 처백부 김좌명(金佐明)이 우역에 걸린 흑우(黑牛)를 치료할 약물을 구하겠다고 하자, 현종은 ‘앞으로 제향할 일이 걱정이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사관은 “희생(犧牲)에 재변이 생긴 것은 변고 중에서도 큰 변고이다. 그런데 신하는 재이(災異: 재난이나 괴이한 일)로 아뢰지 않고, 임금은 반성할 마음을 다잡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치료하고 흑우를 계속 쓸 수 있는지만 따지고 있다. 임금이나 신하 모두 잘못되었다 하겠다.” 현종 4년 6월2일자 실록 기사이다.

성리학 사회인 조선왕조에서 제향에 올릴 희생이 죽는 다는 것은 변고 중의 큰 변고이자 재난이었다. 재난에 대처하는 왕은 자신의 통치 행위에 대한 반성을, 관료는 왕과 함께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직 제사만을 걱정했다. 우역을 재난으로 인식한 사관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논평을 남겼던 것이다.

▲ 지난 2월20일 오후 서울 서울시청 앞 미세먼지 알림판에 예비비상저감조치 시행을 알리는 가운데 한 시민이 마스크를 쓰고 길을 재촉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지난 2월20일 오후 서울 서울시청 앞 미세먼지 알림판에 예비비상저감조치 시행을 알리는 가운데 한 시민이 마스크를 쓰고 길을 재촉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최근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제안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를 위해 범사회적기구를 만들기로 하면서 위원장에는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위촉되었다. 늦게나마 미세먼지를 재난으로 인식한 결과라서 매우 다행스럽다. 그동안 환경부담개선금도 내왔던 노후 경유차만 단속하는 근시안적 대책에서 한걸음 나아가는 모습이고, 여·야 협치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게다가 반기문 전 총장으로서도 본인의 경험을 살려 국가에 도움이 될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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