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터져 나오려 했다. 그것이 이미 세상을 등진 자연 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는지,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였는지,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이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열두 번이나 경찰과 검찰에 불려나가 끝없이 반복했던 증언은, 내게는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 이야기들이 여전히 진위를 가리기 위해 법정 공방을 벌여야 하는 것임을 절감한 눈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 장자연씨 사망 10주기를 맞아 지난 7일 장씨와 같은 소속사에 있던 동료배우 윤지오씨가 낸 책 ‘13번째 증언’의 일부다. 장씨를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조아무개 전 조선일보 기자(윤씨는 그를 C라고 썼다)의 재판에 지난해 말 윤씨가 출석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검찰 측 증인으로 법원에 출석해 그는 13번째 증언을 했다.

약자는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다. 10년 전 대질했던 조 전 기자를 법정에서 다시 마주해야했다. 윤씨는 이미 열두 번이나, 마치 죄인처럼 새벽시간에 수사기관에 불려가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그의 말은 무시당했다. 피의자 측 변호인 역시 10년 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전했다. 윤씨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불편한 질문들이었다.

▲ 지난 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윤지오씨. 사진=노컷뉴스
▲ 지난 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윤지오씨. 사진=노컷뉴스

 

이 책엔 장씨 성추행 장면을 증언한 유일한 목격자의 생생한 감정이 담겨있다. 법원 정문에 진을 치고 있을 많은 카메라를 피하려고 일찍 길을 나섰지만 길이 막히자 윤씨는 “자꾸만 목이 타 연신 생수를 들이켰던” 모습을 회상했다. 윤씨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으려 했다.

법정 진술과정 역시 숨 막혔다. 윤씨는 “피의자 측 변호인의 질문이 시작되자 가리개 너머로 C의 기침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며 “유난히 크고 무겁게 느껴진 그의 기침소리는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려 내게 심리적 위축을 주려는 의도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성추행으로 징역 6년형을 받은 이윤택씨가 재판에서 “피해자들이 용기 내 증언할 때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모습을 연상케 한다.

윤씨의 노력 덕일까. ‘장자연 리스트’는 잊히지 않았다.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8년 2월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1차 사전조사 대상에 장자연 리스트를 포함하지 않자 여론의 비난이 일었다. 4월 2차 사전조사 대상에 장자연 리스트를 포함했고, 같은해 6월 과거사위는 장자연 사건 재조사를 권고했다. 장자연 리스트 중 공소시효가 임박했던 조 전 기자를 재수사했다. 원래 수사를 맡았던 수원지검 성남지청이 아닌 서울중앙지검으로 이관했다.

사건이 2009년 8월5일에 있었기 때문에 2018년 8월이 되면서 장자연 리스트의 공소시효가 끝났다. 조 전 기자만 불구속 기소됐다. 윤씨는 “나머지 성상납 의혹이나 리스트 재수사를 불가능하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라며 “재수사로 밝힐 수 있는 것이 C의 성추행과 검경의 고의 사건 축소와 부실수사 정도라니, 성상납 규명과 연루된 자들의 처벌은 불가하다는 사실에 실망스러웠다”고 했다. “취재진을 믿지 않는다”고 한 그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인터뷰에 나서고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 장자연씨의 동료배우 윤지오씨가 쓴 책 '13번째 증언'
▲ 장자연씨의 동료배우 윤지오씨가 쓴 책 '13번째 증언'

 

 

윤씨는 “자연 언니를 성추행한 사람은 내 기억 속에서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이 줄곧 C였다”며 그날의 일을 책에 상세히 적었다.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자연 언니’의 부당한 상황도 전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언니는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의상과 분장을 도와주는 스타일리스트와 촬영 일을 봐주는 매니저의 월급, 그리고 촬영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본인 돈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찍은 영화에서는 베드 씬 촬영이 있었다는 말도 했다. 처음 촬영을 시작할 때 이야기했던 것과 달리 영화 촬영이 진행될수록 신체노출 강도가 점점 심해져 끝내는 전라 연기를 했다는 것이었다. 보통 신체노출이 많은 성인영화에서는 촬영 전에 배우가 어느 부분까지 노출을 할지 감독과 확정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감독과 배우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소속사가 나서 문제제기하고 조율하는 게 일반적이다. 심지어 베드씬을 촬영한 날 매니저마저 촬영 현장에 오지 않아서 언니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들었다.”

▲ 2009년 3월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장자연씨. 사진=노컷뉴스
▲ 2009년 3월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장자연씨. 사진=노컷뉴스

 

윤씨가 공개한 ‘전속계약서’도 주목할 부분이다. ‘을’은 연예활동 전반에 걸쳐 ‘갑’의 결정·지시에 충실히 따라야 하고 ‘을’은 ‘갑’이 제시한 활동을 전적으로 수락하며 행사 불참 시 ‘갑’이 제시하는 민·형사상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을’이 의무를 위반하면 ‘갑’의 재량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데 ‘을’이 부담할 위약금은 1억원이었다. 윤씨의 계약서는 장씨의 것과 날짜만 빼고 다 똑같았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흔한 ‘갑질’의 근거들과 비슷하다.

‘장자연 리스트’를 잘 아는 이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윤씨는 13번의 검·경 진술과 법정 증언을 마치고 “내 잘못도 네 잘못도 아니야”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최종 보고서 작성에 들어간 대검찰청 과거사 진상조사단은 이달 말 장자연 사건 관련 조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 관련기사 : 장자연 강제추행 목격자 “그날 기억 선명” / 장자연 강제추행 부인 유력인사들, 어떻게 진술 짜 맞췄나 ]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