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육군사관학교의 역사적 뿌리를 ‘신흥무관학교’라고 규정해 그 배경이 주목된다.

신흥무관학교는 국치 이후 최초의 항일무장투쟁 단체이자 3500여명에 이르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군 양성기관이었다. 그에 반해 육군사관학교는 초기 설립을 주도한 이들 상당수가 일본 육사 출신이며 이들 가운데 일부가 군사쿠데타를 통해 민주주의 파괴를 앞장선 정치군인의 산실이라는 오명을 받아왔다. 이런 두 기관의 역사적 연결은 무리다. 그런데도 왜 문 대통령은 육사의 역사적 뿌리가 신흥무관학교에 있다고 했을까.

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육군사관학교 75기 졸업 및 임관식에 친서를 보냈다. 최큰별 소령(진)이 낭독한 친서에서 문 대통령은 “여러분이 임관하는 올해는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다. 육군사관학교의 역사적 뿌리도 100여년 전 ‘신흥무관학교’에 이른다”고 해석했다. 문 대통령은 그 공통점으로 “그곳을 나온 독립군의 희생정신은 ‘안이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는 육군사관생도 신조로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문 대통령은 “이제 여러분에게 조국의 산하를 맡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여러분이 최고의 명예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정부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그동안 육군사관학교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보다는 권력찬탈이나 권력을 지향하는 양성소라는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혀 있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 2기생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켜 이 땅을 장기간 군사독재국가로 만들었다. 함께 쿠데타 가담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육사 8기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 동기생으로 1979년 12‧12 쿠데타로 자신의 육사 선배인 박정희의 뒤를 이어 권력을 찬탈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경우 모두 일제 강점하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박정희는 만주의 신경군관학교 입대를 위해 충성혈서를 제출해 입교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1939년 만주신문은 그가 멸사봉공의 자세로 견마지로의 충성을 다할 결심이라고 입학을 청원했다고 보도했다.

육군사관학교는 해방직후 국방경비대사관학교(1946년 5월1일), 조선경비대사관학교(그해 6월15일)를 1948년 9월5일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로 명칭이 확립됐다. 해방직후 한국전쟁 시까지 육군사관학교장 11명의 면면을 보면 당시 육사 책임자들의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절반은 일본 육사 또는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이른바 친일군인이며 절반은 독립군 전력이 있다.

초대 육사 교장 이은 이형근은 1942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2대 교장 원용덕은 1933년 만주국군 군의(軍醫) 특임에 부임했고, 1936년에는 조선인들의 사상통제를 위해 일본군 육군특무기관이 조직한 단체 ‘흥아협회’에 참여한데 이어 이듬해 9월 제1독립포병대대에 부임했다. 부산정치파동과 반공포로 탈출을 주도한 이승만의 오른팔이었다.

3대 교장 정일권(47년 1~5월)은 1935년 일본이 만주국(滿洲國)에 세운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5기)에 합격해 1937년 졸업후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만주국군(滿洲國軍)의 대위에 진급하고, 1942년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5대 교장 김백일(47년 11월~48년 7월)은 1936년 만주국에서 장교를 양성하는 봉천군관학교의 5기 군관후보생 시험에 합격, 1937년 9월 졸업하였다. 견습사관을 거쳐 그 해 12월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되어 제3군관구 예하 보병 제15단에 배속되었다. 그는 1938년 12월 무렵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과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독립군 토벌대이다.

10대 교장 김종오 소장(52년 11월~54년 3월)은 일본 쥬오대학(中央大學) 재학 중인 1944년에 학도병에 입대, 소위로 임관했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일 해외독립운동 유공자 후손을 초청해 오찬을 열고 있다. 사진=청와대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4일 해외독립운동 유공자 후손을 초청해 오찬을 열고 있다. 사진=청와대
반대로 광복군이나 독립운동의 전력이 있는 교장도 있었다. 4대 교장 송호성(47년 5~10월)은 1942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이 되었으며, 이후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에도 관여한 인물이다. 6대 교장 최덕신(48년 7월~49년 1월)은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1936년 중국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졸업하고 광복군에 복무하며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 당시 8사단장과 제11사단장으로 참전하다 거창양민학살을 저지른 데 책임자 가운데 한 명이다. 7대 교장 김홍일 준장(49년 1월~50년 6월)은 독립군, 장제스의 중국 국민혁명군,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하고, 이봉창의 거사를 지원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야당생활을 했다.

제8대 교장 이준식(50년 6월~7월)은 운남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 졸업하고, 1929년 5월 국민부 산하조선혁명군 총사령관, 1930년 ~ 1939년 중화민국 국부군 복무했다. 9대 교장 안춘생 준장(51년 10월~52년 11월)은 안중근 의사의 5촌조카로, 중앙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해 중국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대일전에 참전, 일본해군육전대 사령부를 공격하고 인상항의 보산지창(寶山紙廠)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1942년 4월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도 맡았다.

문 대통령이 이 같은 육군사관학교의 뿌리를 신흥무관학교에까지 연결하려 한 것은 현재의 군사학교생들이 배우는 가치에 독립군의 희생이 포함돼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8월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도 우리 육군사관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윤경로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장은 지난 6월10일 신흥무관학교 107주년 기념식을 육사 화랑연병장서 개최했다. 사업회는 “경술국치 이후 해외 최초의 항일무장독립운동 단체로 3500여 명에 이르는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기념사업회는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이자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인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널리 알리고 계승하고자 육군사관학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비록 시작은 남의 나라 땅 그것도 보잘것없는 창고였을망정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졸업생들과 교관들은 이후 청산리·봉오동대첩을 비롯한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며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고려혁명군, 한국광복군 등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초대교장을 지낸 이동녕 선생이 조회 때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에게 역설하였듯이 신흥무관학교는 오늘날 우리 국군이 정통으로 삼아야 할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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