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일자 KBS 인사 가운데 눈에 띄는 이는 이훈희 제작2본부장이다. 이전까지 그는 SM C&C 대표였다. SM C&C는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다. 프로그램 제작, 연예 매니지먼트, 광고 대행사 등을 담당한다. SM C&C는 지난달 25일 이훈희 대표 사임으로 새 대표를 선임했다고 밝혔다.

이 본부장은 1993년 KBS 19기로 입사해 2006년까지 KBS 예능국 PD로 활동했다. KBS 2TV 간판 예능 ‘해피투게더-쟁반노래방’을 만들고 ‘여걸식스’, ‘뮤직뱅크’ 등을 연출했다. KBS 예능 황금기 중심에 있던 KBS PD다. KBS를 떠나 2008~2012년까지 코엔미디어 이사를 지냈다. 

2012년부터는 훈미디어를 설립해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SM C&C가 예능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훈미디어를 흡수 합병하면서 그는 SM C&C 예능제작본부 총괄본부장이 됐다. 2017년에는 SM C&C 대표가 됐다. 13년 만의 KBS 복귀다.

KBS는 신설한 ‘제작2본부’에 대해 “제작·마케팅·콘텐츠 사업 조직을 유기적으로 통합한 본부”라며 “제작 조직 자율성을 확대하고 의사 결정 단계를 줄인 제작2본부를 통해 우수 드라마와 예능 콘텐츠가 나올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부를 경험한 외부인’인 이 본부장이 적임자란 판단이다. 이 본부장 영입에 양승동 사장 등 KBS 관계자들의 ‘삼고초려’, 그 이상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 이훈희 신임 KBS 제작2본부장이 지난 2월28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이훈희 신임 KBS 제작2본부장이 지난 2월28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지난달 28일 서울역 인근에서 만난 이 본부장은 “몇 달 전 KBS로부터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고사해왔다”며 “내가 메시나 호날두 같이 개인기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개인기를 갖고 있대도 지상파 위기가 개인기로 돌파할 수 있는 상황인가 고심하게 되더라. 내가 간다고 좋아지겠느냐는 의문이 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는 “양승동 KBS 사장을 뵙기도 했지만 ‘KBS 분위기를 한번 바꿔보자’는 데 공감했기 때문”에 숙고 끝에 KBS 제안을 수락했다.

그가 KBS가 떠났던 2000년대 중반은 ‘지상파의 호시절’이었다. 이 본부장은 현 상황에 “내가 KBS를 떠날 때와 비교하면 매체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며 “종합편성채널이 생겼고 뉴미디어들이 비약적으로 도약하고 있다. 지상파가 여러 매체 중 ‘일부’가 됐다. 위상은 많이 약화했고 JTBC와 tvN 약진으로 현장은 위축돼 있는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그는 “플랫폼으로서 지상파는 다른 플랫폼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지 않다”며 “플랫폼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결국 KBS만의 색깔을 만들어야 한다. 핵심은 콘텐츠다. 콘텐츠 중심 조직, 디지털 혁신 조직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양 사장 생각에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KBS에서 맡게 될 역할은 드라마와 예능은 물론 광고와 콘텐츠 사업 등 외부 비즈니스까지 총괄하는 것이다. 드라마·예능 중심으로 먹거리를 찾고 조직을 개편하는 건 비단 KBS만이 아니다. MBC도 지난해 11월 중국 예능시장을 공략해온 김영희 전 MBC PD를 콘텐츠 제작부문 책임자에 앉혔다. SBS도 올해 상반기 중으로 드라마본부를 독립시킬 전망이다. 

생존을 걱정해야 할 만큼 CJ ENM에서 분사한 ‘스튜디오드래곤’이나 JTBC와의 싸움에서 지상파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상파 PD들의 ‘tvN행’, 즉 탈지상파에 대한 현장 일선의 고민은 오래됐다.

이 본부장은 “시장 상황이 거대 자본들 싸움처럼 흘러가고 있다”며 “방송사 같은 조직의 경쟁력은 크리에이터를 육성하고 보유하는 데서 나온다. 그들이 계속 방송사에 남아있을 유인이 외부로 나갈 때 이점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하다”고 했다. 

이어 “구성원에 대한 성과 보상 문제는 일정 부분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며 “KBS를 포함한 지상파 방송사들이 좋은 PD를 육성하는 사관학교처럼 됐다. 인력 유출을 방어하려면 자체 보상제도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지상파 위기’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사업자들이 국내 시장에 안착했다. 유튜브는 전 세계 동영상 시장을 지배했다. 이 본부장은 “지상파 위기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라며 “그렇지만 외국 공영방송 대처는 민첩하다. BBC도 분사와 스튜디오 체제를 통해 콘텐츠 퀄리티를 높이고 있다. 스튜디오 체제나 분사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구성원들과 함께 고민하고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다보면 ‘구조 변화’라는 큰 주제에 생각이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지상파도 SK텔레콤과 함께 지상파 미디어플랫폼 ‘푹’(POOQ)과 SK브로드밴드의 ‘옥수수’(oksusu) 통합을 선언하며 글로벌 OTT 사업자 대응 전략에 나섰다. 이 본부장은 “매체 전반에서 통신의 중요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며 “과거 지상파와 통신의 관계가 적대적이었다면 지금은 관계 설정이 달라졌다. 이 부분도 우리가 선도해야 한다. 지상파의 의사 결정 구조가 단순하지 않아 주도권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 이훈희 신임 KBS 제작2본부장이 지난 2월28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이훈희 신임 KBS 제작2본부장이 지난 2월28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그는 인터뷰 내내 ‘공감과 소통’을 강조했다. “어떤 좋은 방향이라도 구성원 동의와 공감이 없으면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공감과 동의 없는, 소수 주도 변화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사례를 많이 봤다. 보고 받고 지시하는 본부장이 아니라 의논·협의하고 고민하는 상대가 되겠다. 제 자리가 권력이나 권한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역할과 책임의 자리로 인식됐으면 한다. 거대한 수풀에서 옛길을 찾는 건 불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새 길을 찾는 고민만큼은 구성원들과 함께 쉼 없이 해야 한다. KBS가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구성원들과 함께 가늠할 것이다. 구성원 동의와 공감을 전제로 KBS 영향력을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본부장은 “외부인인가, 내부인인가. 저를 보는 구성원 시선도 하나가 아닐 거라고 본다”며 “저의 이중적 정체성이 KBS 변화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KBS가 전진하는 데 ‘겹눈’을 가진 내가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그는 “KBS 영향력 제고는 곧 크리에이터들의 영향력 제고의 다름 아니다. 우리 KBS 크리에이터들이 마음 놓고 콘텐츠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 위축돼 있는 우리 현장을 담대해지도록 만들고 싶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현장에 ‘담대함’을 심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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