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곳곳에서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고 있다. 이는 3·1운동의 자주성과 항일정신을 기념하며 그동안 배제했던 여성 목소리에 주목하겠다는 뜻이다. 여성 독립운동가처럼 오랜 기간 외면 받아온 이들이 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면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려 모집한 여성 근로정신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대표 시민단체 이름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인 것만 봐도 한국사회는 일본군 성노예로 착취당한 위안부를 정신대와 같은 말로 인식하고 있다. 위안부와 정신대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심각한 상황이 펼쳐졌다.

근로정신대는 일제가 1944년 8월 공포한 ‘여자정신근로령’을 근거로 동원한(물론 이전에도 강제동원이 있었다) 이들이다. 12세에서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조선여성이 대상으로 공개모집하거나 관청·학교가 알선해 군수공장 등으로 보냈다.

이들 중 일부는 군수공장에 가서 노동착취를 당했지만 일부는 군 위안소로 끌려가 성을 착취당했는데 1940년대 당시에도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다.

1946년 5월12일 서울신문은 “이 땅의 딸들을 여자정신대 혹은 위안부대라는 미명으로 일본은 물론 멀리 중국 남양 등지에 강제로 혹은 기만해 보냈다”고 했다. 친일연구자 임종국도 “한국 처녀들이 정신대로 본격 증발되기 시작한 건 1942년 1월 이후지만 누구도 그녀들이 일본 군대의 위안부가 되리란 것을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 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위안부 고 이순덕할머니, 원고들을 도운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 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위안부 고 이순덕할머니, 원고들을 도운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이후 한국 사회에선 정신대와 위안부가 구분 없이 여성 강제동원을 뜻했다. 1970년 8월14일 서울신문은 “일제는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숱한 부녀자를 동원, 군수 공장의 직공이나 전방 부대 위안부로 희생시켰다”고 했다. 1990년대 정대협이 피해자 신고를 받자 강제노역 피해자와 성적 피해자가 모두 신고했다. 정진성 서울대 교수는 “정신대가 한국인들 인식 속에서 양 피해(강제노동·성착취)를 포괄하는 개념인 동시에 그 둘을 구분할 필요성”이라고 했다.

정대협을 중심으로 한 위안부 피해자들 목소리가 시민들의 공감을 얻으며 의도치 않게 강제노역에 시달린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존재가 지워졌다. 윤미향 정대협 대표는 지난해 7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위안부와 근로정신대가 다르긴 하지만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피해자들을) 끌고 가 단체이름에 정신대가 들어갔다”며 “위안부 할머니들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은 서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고생을 했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사실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았다. 정신대가 곧 위안부로 인식되는 바람에 여성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정신대라고 밝히는 순간 성폭력 피해자로 알려졌다.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게 알려져 결혼을 못하거나 파혼당하기도 했다. 정신대 피해자들은 자신이 위안부가 아니라고 적극 항변해야 했고 위안부 피해자들과 불필요한 오해가 쌓였다. 자신이 경험한 사실조차 말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위안부만 남고 근로정신대는 사라졌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피해자 10명이 1992년 12월부터 약 10년간 하‘관’(시모노세키)과 ‘부’산을 오가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 등을 요구한 소송을 다뤘는데 영화 끝부분에 잘못된 내용을 넣었다.

▲ 관부재판 1심 판결에서 근로정신대 사건이 기각되자 판결에 비통해 하는 아사히신문 보도 속의 양금덕 할머니 모습. 사진=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 관부재판 1심 판결에서 근로정신대 사건이 기각되자 판결에 비통해 하는 아사히신문 보도 속의 양금덕 할머니 모습. 사진=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지난 2017년 4월4일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씨가 사망했는데 이를 ‘관부재판 마지막 원고가 사망했다’고 잘못 알렸다. 이씨는 위안부 중 마지막 원고였지만 실제 원고 중엔 근로정신대 생존자가 있었다. 생존자는 심지어 관부재판 패소 이후 일본과 한국 법원에 소송까지 진행하고 있었다. 정신대가 위안부로 축소되면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셈이다.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대표는 지난해 7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근로정신대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다”며 “오해를 바로 잡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예술작품 등에서도 위안부 문제는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근로정신대를 다룬 소설·연극도 없고 제대로 된 연구물도 없다”고 덧붙였다.

이 대표는 “사회가 방치하고 무시하는 가운데 피해자들과 국민들 사이에서 혼동을 부채질하거나 유통되도록 방조한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강제동원 피해자의 규모조차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있다. 이 대표는 “일본기업과 소송에서 한국 정부는 ‘사인 간 소송’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며 근로정신대 문제를 철저히 방관했다고 비판했다.

정부마저 외면한 피해자들은 일본 사법부에서 황당한 판결을 받았다.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에 소송한 결과 지난 2009년 피해자 9명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선고 당시 약 1300원) 지급 판결을 받았다. 1944년 화폐가치 수준으로 돈을 준 것이다. 2015년에도 일본 재판부는 피해자 3명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 199엔(선고 당시 약 1850원) 지급 판결을 내렸다.

일본 사법부는 일본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나타낼 언어를 잃은 자들은 조롱당했다. 정진성 교수는 “강제동원돼 착취당한 내용에 따라 근로정신대와 군 위안부를 구분해 부르자”며 “다만 이 둘을 엄격히 구분해 시행한 제도로 인정해선 안 된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1일 미쓰비시를 상대로 근로정신대 소송을 제기한 원고 심선애씨가 세상을 떠났다. 여성 근로정신대는 아니지만 지난 1월25일 미쓰비시를 상대로 대법원에서 승소한 김중곤씨가 사망했다. 드러난 피해자들이 떠나고 있고 어딘가에는 오해를 일으킬까 두려워 말 못한 정신대 피해자들이 떠나고 있을지 모른다.

※참고문헌
정진성, 군 위안부/정신대의 개념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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