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차 북미정상회담 도중 기자 질문에 답했다. 사실상 처음이다. 수많은 언론이 ‘정상회담 결렬’과 관련한 기사를 쏟아내는 가운데 놓쳐선 안 될 정상회담 성과 중의 하나다. ‘현송월 총살’ 오보에도 현송월이 직접 살아서 등장하기 전까지 확인이 불가능했던 우리의 북한 관련 보도현실에서 ‘크로스체크’가 가능해진 일대 전환점을 만든 장면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40분간 단독 정상회담을 마친 뒤 확대회담으로 전환 직전 백악관 취재진의 질문을 받았다. 김 위원장은 ‘비핵화 준비가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작심한 듯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최고의 대답”이라며 트럼프가 치켜세웠다. 질문 회피 대신 답을 통해 ‘승부수’를 띄운 대목이었다.
예컨대 ‘평양연락소 개설 준비가 돼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계속되는 질문을 참다못한 리용호 외무상이 “기자들 내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나, 김 위원장은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 취재진에게 “우리가 충분한 이야기를 좀 더 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1분이라도 귀중하니까”라며 웃었다. 취재진을 향해 “감사합니다”라고도 말했다.
앞서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4·27 판문점선언 당시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기자회견에 나섰다. 당시 김 위원장은 “커다란 관심과 기대를 표시해준 기자 여러분들께도 사의를 표합니다”라고 말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올해 초 김 위원장은 조선중앙TV를 통해 양복을 입고 집무실 소파에 앉아 신년사를 발표하는 파격을 보였다. 당시 언론은 ‘독재자’가 아닌 정상국가 지도자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북한의 기존 언론관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것이었다. 북한은 언론을 당적 언론과 반동적 언론으로 구분하며 한국 언론계에서 통용되는 불편부당성과 객관성을 ‘부르주아적 객관주의’라 부르며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해왔다. 북한에게 언론은 ‘김일성주의화에 이바지하는 사상적 무기’다. 그러나 지금은 ‘반동적 언론’까지 적극 활용하는 모양새다.
김영주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명예교수는 지난해 12월 언론중재위원회 정책토론회에서 이런 북한의 기존 언론관을 설명하며 “김정은의 등장과 그의 여동생 김여정이 선전선동에 관여하면서 북한 언론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백두혈통인 김여정은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으로 선전의 핵심 담당자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의 후계자 지명 뒤 조선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의 인터넷판을 만들어 해외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 기관지를 가감 없이 해외로 내보내며 내부 정보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그해 광명성 3호 인공위성 발사를 앞두고 외신기자를 초청해 관련시설을 공개하고 연설에서 아버지 시대를 간접 비판하는가 하면, 위성발사 실패 뒤 언론에 “지구관측위성의 궤도진입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북한 언론은 2012년 4월15일 김일성 100회 생일 기념행사에서 김정은이 김일성을 연상시키는 외모와 어투로 공개연설하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그해 5월9일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주요매체는 김정은 제1비서가 평양의 만경대 유희장을 방문해 보도블록에 난 잡풀을 직접 뽑으며 “손이 있으면서 왜 잡풀을 뽑지 못하느냐”고 관리자들을 질타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조선중앙TV에 속보성 보도가 등장했고 스튜디오도 달라졌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북미 정상이 합의문을 도출해내지 못했으나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국경없는기자회가 매년 선정하는 ‘언론자유’ 세계 최하위 국가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언론의 질문에 답한 건 분명한 성과다. 그는 질문에 답하면서 ‘언론의 역할’을 인정했다. 지금껏 외신에 대한 북한체제 전반의 대응에 변화를 예고하는 메시지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북한이 정상국가로 가는 한 장면을 봤다. 머지않아 한국 언론과 김정은 위원장의 인터뷰도 현실화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