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이 연일 문재인 정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주장하며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문재인정부 비판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박근혜정부에서 자행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진상규명에 앞장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년 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9473명에게 이 ‘국가폭력’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월24일 국내 최초 ‘블랙리스트’ 국가배상 1심 판결 선고가 나왔다. 청주지법 민사12부(부장판사 오기두)는 박근혜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국가책임을 인정하며 “개인 2명과 단체 2곳에 각 2000만원을, 나머지 원고 23명에게 각 1500만 원 등 모두 4억25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소송비용 대납까지 국가에 명령했다.

앞서 충북지역 블랙리스트 문화예술가들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2017년 2월27일 국가를 상대로 원고 1명당 각 2000만 원 등 모두 5억6000만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연합뉴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연합뉴스
2013년 8월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간 장악했다. 정권 초기에 사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취지로 발언한 뒤 이듬해 1월 ‘좌파’에 대한 지원현황을 전수조사 하도록 지시하며 “좌파활동 단체 지원은 곤란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해 5월 ‘문화예술계 지원배제명단’,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에 의해 작성돼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에 전달됐다.

문체부는 블랙리스트를 업데이트하며 지원 사업이나 각종 수혜 대상자 선정에 반영했다. 문체부 예술정책과 사무관은 △세월호 시국선언 △문재인 지지선언 △박원순 지지선언 등에 포함된 이들을 확인해 문체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총 9473명의 지원배제명단이 작성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에 보고됐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을 가리켜 “특정 정파가 집권하고 있던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예술가 개인이나 예술가 단체를 일방적으로 정부 지원 대상에서 배제하고자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실제로 지원배제까지 나아가 예술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예술가의 사상과 양심 형성 과정을 통제하고, 특정한 사상과 양심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거나, 특정된 사상과 양심만을 형성하도록 강요한다면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며 위법성을 인정한 뒤 “정부에 의한 표현의 자유 제한 시도는 손해배상액수를 정함에 있어서 보다 엄중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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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원고측 손해배상청구액의 상당수가 인용됐다. 재판부는 블랙리스트에 의한 손해와 관련 “수량적으로는 산정할 수 없으나 사회통념상 금전평가가 가능한 무형의 손해, 즉 예술 활동을 위한 목적사업수행에 제약을 받음으로 인해 예술가들의 예술적 결사의 자유를 침해받는 손해를 입었다”고 판시했다.

정부법무공단은 지난 12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정부 또한 사안의 위법성에 대해선 이견이 없지만 1심판결이 배상액 산정에 대한 구체적 판단이 부족했다며 상급심의 심리를 통해 배상액 산정에 대한 합리적 기준을 마련해 향후 이어질 다른 소송에서의 혼란을 방지하려는 취지로 항소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관련 국가배상소송은 현재 8건이 진행 중이다. 판례로 배상기준이 마련되어야 실질적인 블랙리스트 피해자 배상절차가 이뤄질 전망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 위원회(진상조사위) 대변인이었던 이원재 문화연대 시민자치문화센터 소장은 종료된 진상조사위 활동을 두고 “블랙리스트 사태와 관련된 문화행정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고 토론되는 성과가 있었다”고 밝히면서도 “문체부 장관 훈령에 의한 자문기구로서 실질적인 조사권의 부재, 블랙리스트 관련 주요 자료 확보의 어려움 등 진상규명 조사라는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집행하기에는 권한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원재 소장은 특히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공식적으로 위원회 활동의 중단·해체를 요구할 정도로 적극적인 조사 방해 행위를 했다. 위원회 활동 예산 대부분을 삭감하는 식으로 위원회 활동을 크게 위축시켰다”고 비판했다. 조사위원·조사기간·조사범위 등 모든 진상조사활동이 블랙리스트 사태의 가해자격인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들의 방해로 인해 지속적으로 축소됐다는 설명이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그는 감옥에 갔으나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연합뉴스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그는 감옥에 갔으나 블랙리스트 진상규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연합뉴스
결국 진상조사위는 12개월의 활동기간 동안 블랙리스트 사태 전반과 개별 사건에 대한 세부조사부터 제도개선 방안, 결과보고서 작성, 책임규명안 권고 등 많은 활동을 물리적 한계 속에 진행해야 했다. 때문에 진상조사위 활동기간이 끝났지만 블랙리스트 사건들의 경우 이명박정부 시절 블랙리스트 조사를 비롯해 상당 부분에서 조사가 진행되지 못한 상황이다.

앞서 문체부는 지난해 12월31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책임규명 이행계획 종합보고회’를 개최하고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블랙리스트 사태로 고통 받았던 예술인과 문체부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았던 산하 기관 직원들에게 직접 사과했다. 당시 문체부는 블랙리스트 관련 문체부 내부 징계가 부족하다는 비판에 “이행협치추진단 민간위원 등 문화예술계의 의견을 수렴해 10명을 수사의뢰, 68명을 징계 또는 주의조치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9월 발표했던 이행계획안에서 수사의뢰 3명, 징계 1명이 추가된 숫자에 불과했다.

무엇을 해야할까. 문화예술계는 문체부 이행협치추진단을 기반으로 한 정부대응을 이어가는 가운데 블랙리스트가 반복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 등을 규정하는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가칭) 제정을 국회에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민사소송인단을 통해 운동의 연속성을 이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민사소송인단은 3월 중 2차 민사소송인단을 공개 모집할 계획이다. 관건은 지속적인 사회적 관심이다. 최근 블랙리스트 문제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자유한국당이 적극 ‘연대’해야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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