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외주)제작사가 만든 수학교육 콘텐츠 캐릭터 ‘수학술사 세미’를 EBS가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온 가운데 수학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도 EBS 측의 ‘갑질’이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EBS가 요구하는 내용에 비해 비용이 터무니없이 적었다는 주장이다. 제작사 대표 A씨는 지난해 7월 EBS가 하도급법을 위반했다며 13억 8500여만원에 해당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관련기사 : EBS ‘수학술사 세미’ 캐릭터 무단 사용 논란]

A씨가 낸 소장의 요지는 EBS 측이 제작단가를 줄이면서도 수학 콘텐츠의 양과 질을 개선하기 위해 A씨에게 ‘갑질’을 했다는 것이다. 

소장에 따르면 A씨와 EBS는 2015년과 2016년 ‘EBS Math 융합형 콘텐츠 제작’을 목적으로 각각 4억3000여만원의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2015년에는 5분짜리 영상 24편(총 120분), 2016년에는 7분짜리 영상 26편(총 182분) 제작을 계약했지만 EBS 측에서 해당 분량에 담을 수 없는 많은 내용을 넣으라고 요구했다는 게 A씨 주장이다. 2015년에는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2016년에는 5학년 2학기 수학 교육과정을 다뤘다.

▲ EBS 로고
▲ EBS 로고

그 결과 계약분량의 2배가 넘는 길이(2015년 221분, 2016년 333분)의 영상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15년 작업 초기엔 납품단가에 맞게 콘텐츠를 제작했지만 EBS 측이 몇 개월 간 “이왕 고치는 거 하나 더 고치자”는 식으로 재제작과 수정을 요구해 영상이 길어졌다는 설명이다. 영상이 길어지면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만 이는 모두 A씨 부담이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2016년 계약에는 영상이 7분으로 길어졌고, 실질적으론 14분가량으로 제작됐는데 편당 제작비는 오히려 110만원이나 깎았다. 전년대비 길이는 40% 증가했지만 제작비는 40% 깎인 셈이었다. A씨는 “EBS의 담당 부장이 ‘무조건 돈을 깎을 수밖에 없다. 미안하다’고 말하며 단가를 낮췄다”고 전하며 제작비 삭감이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A씨는 또한 EBS 측이 영상 뿐 아니라 계약서에 없는 게임 작업을 요구했다고 전했다. 약 2년에 걸쳐 만든 융합협 콘텐츠 게임의 제작비·수정비용은 모두 A씨가 부담했다고 주장했다.

계약서부터 불공정했던 거래?

A씨는 EBS와 EBS Math에 콘텐츠를 제공하는 용역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서에는 EBS와 A씨의 권력관계가 그대로 반영됐다. A씨는 자신의 제작사가 EBS의 갑질 등으로 어려워져 폐업신고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EBS와 A씨가 맺은 2015년 용역계약서 3조를 보면 발주자(EBS)는 계약상대자(A씨) 작업과정 중에 수시로 중간검사를 실시할 수 있고 검수 결과 EBS의 방송제작 의도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EBS는 A씨에게 수정·보완을 요구하고 A씨는 지체 없이 이에 따라야 한다. 이때 추가 제작비는 A씨 부담이다.

▲ 2015년 EBS 용역계약서를 보면 발주자(EBS)의 방송제작 의도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EBS는 계약상대자(제작사)에 수정보완을 요구할 수 있고  추가 제작비는 제작사 부담이다.
▲ 2015년 EBS 용역계약서를 보면 발주자(EBS)의 방송제작 의도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EBS는 계약상대자(제작사)에 수정보완을 요구할 수 있고 추가 제작비는 제작사 부담이다.

‘방송제작 의도’라는 주관적인 표현은 악용할 소지가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2015년 개정한 ‘방송업종 표준하도급계약서’ 13조를 보면 검사의 기준·방법은 원사업자(방송사)와 수급사업자(제작사)가 협의해 객관·공정·타당하게 정한다고 제시했다.

EBS는 용역계약서 7조에서 EBS 검수 결과 3번 이상 불합격했을 때 계약을 해제·해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보통 용역계약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조항이다. 한 독립PD는 EBS 계약서의 기준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며 “기준이 엿가락처럼 왔다 갔다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의제기를 막아놓은 조항도 논란이다. 계약서 9조를 보면 EBS 내외부 사정에 의해 사업 범위가 축소·폐지·변경되더라도 제작사는 이의를 제기하거나 민·형사상 책임과 손해배상청구를 하지 않도록 한다고 돼 있다. 한 독립PD는 “시청률 등의 이유로 맘대로 종영할 수 있고 사실상 방송사는 약속을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라며 “계약을 무력화하는 조항”이라고 비판했다.

▲ EBS 용역계약서 9조를 보면 EBS의 사정으로 사업범위가 달라져도 제작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 EBS 용역계약서 9조를 보면 EBS의 사정으로 사업범위가 달라져도 제작사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분량 길어진 건 제작사 책임이라는 EBS

이에 미디어오늘은 EBS 측에 두 차례 관련 질의를 했지만 EBS 측은 지난해 11월6일과 지난 11일 두 차례 모두 “당사자 주장이 달라 소송 진행 중”이라고 답했다.

EBS가 법원에 낸 서면을 보면 “콘텐츠 기획 의도는 5분 분량의 짧고 재밌는 수학 교육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고 분량 조절은 제작사의 업무”라며 “오히려 분량 축소를 (A씨에게) 요구한 사실이 있다”고 답했다. 또한 “계약 대상 콘텐츠를 납품했지 그 외의 콘텐츠 납품을 지시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 2015년 A씨가 EBS에 낸 입찰제안서를 보면 A씨가 분량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 2015년 A씨가 EBS에 낸 입찰제안서를 보면 A씨가 분량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작단가가 정해져있는데 주어진 제작비 안에서 제작사 직원 인건비 등을 지급하고 수익을 남기려면 콘텐츠 분량을 길게 할 유인이 없다는 게 A씨 주장이다. EBS의 답변만으로 이를 반박하긴 쉽지 않다. 

또한 A씨가 EBS에 낸 입찰제안서를 보면 “정해진 분량 안에서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많다”며 “정해진 분량 안에서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을 새 커리큘럼으로 제안했다. 계약 전에 A씨가 분량 축소를 제안했지만 EBS의 요구로 길어졌다고 볼만한 대목이다.

2016년 제작비 삭감에 대해 EBS는 “2015년에는 캐릭터·배경·스토리 등을 개발하는 신규 사업인 반면 2016년 사업은 캐릭터·배경화면 등을 그대로 활용하고 신규 캐릭터 ‘1종 이상’만 개발하면 되는 사업”이라며 “원고(A씨)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A씨는 “2015년과 2016년은 다루는 단원이 달랐고, 다른 배경과 다른 인물 20여명으로 새 스토리를 제작할 걸 EBS가 입찰단계부터 알았다”며 “최소 1종 이상을 개발하라는 말이지 1종만 개발하면 된다는 건 아니”라고 반박했다.

게임 콘텐츠의 경우 EBS가 납품을 지시한 적은 없지만 제작사가 스스로 만든 것을 ‘EBS에 공유했다’고 답변했다. EBS는 “입찰 때 (EBS가) 게임 개발을 제안하긴 했지만 계약대상에 포함하진 않아 EBS는 이를 강제하거나 지시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다”며 “A씨가 ‘게임 초기모델 개발을 진행해야 하느냐’고 문의해 EBS 측이 ‘진행해보면 좋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제시한 것”이라고 답했다.

A씨의 주장은 다르다. A씨는 “당시 사장에게 보여준다며 샘플도 요구했고 수정·보완 안 한다는 이유로 단가를 삭감했다가 나중에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며 (제작사) 로고를 빼라고 했다”며 “내 돈 주고 사업하려고 만든 콘텐츠에 내가 스스로 로고를 뺄 이유도 없고 EBS에 무료로 사용하라고 줄 이유도 없다”고 반박했다.

EBS는 계약서가 불공정하다는 주장도 반박했다. EBS는 “방송사의 방송제작의도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제작사에게 수정·보완을 요구할 수 있고 추가 제작비는 제작사 부담”이라는 계약서 3조를 “통상의 콘텐츠 제작 용역 계약에 있는 일반조항”이며 이 계약내용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의제기를 막은 계약서 9조에 대해서도 EBS는 “일반적으로 방송콘텐츠에 대한 외주(독립)제작계약이 이뤄질 경우 ‘방송사 사정에 따라 계약 범위가 변경될 수 있고 이의제기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대부분 삽입한다”며 “본 사업은 교육부로부터 수학교육 활성화 사업을 위탁받아 전국 시도교육청과 ‘EBS Math 구축·운영’ 위탁사업이라 교육부나 전국시도교육청 사정으로 계약이 변경될 경우 당연히 EBS와 제작사간 사업범위가 변경될 수밖에 없어 이를 대비해 이 조항을 삽입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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