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는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근접하고 식민지의 역사를 겪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최근 신남방정책을 통해 한국의 새로운 경제적 동반자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다. 한국 국민에게 이들 나라들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가기 쉬운 해외여행지 정도로 인식되고 관광정보만 공유되는 실정이다. 이에 자유언론실천재단과 미디어오늘은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아세안(ASEAN) 이웃국가들의 언론 상황과 탄압 실태, 진실 보도와 자유언론 수호를 위한 현지 언론인들의 활동을 취재한 기록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연재의 내용은 자유언론실천재단에서 기획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8년 12월에 발간한 책 ‘우리는 말하고 싶다 : 현장 르포, 분투하는 아시아의 자유언론(박성현·김춘효 지음, 이루 펴냄)’을 토대로 요약, 보완한 것이다. - 편집자 주

# 글 싣는 순서

01)  낯선 이웃 아세안, 분투하는 자유언론
02)  진실 보도에 목숨을 걸다, 필리핀 언론인의 현실
03)  태동하는 언론의 자유, 베트남의 시민언론
04)  언론탄압으로 퇴색한 미얀마의 민주화
05)  새 시대의 길목에 서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언론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로, 또한 독재정권의 희생자로, 수난의 역사를 겪어온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곡의 역사는 이들 국가의 민주화와 자유언론의 실현을 가로막아온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 식민지 통치를 위해 제국주의자들이 사용했던 억압적인 법들은 독재 권력에 의해 계승되어 언론탄압의 수단으로 활용되어왔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식민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1948년에 제정한 인쇄법령(Printing Ordinance)은 말레이시아의 인쇄언론·출판법(Printing Press and Publication Act, 1971)과 싱가포르의 신문·인쇄언론법(Newspaper and Printing Presses Act, 1974)으로 계승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모든 신문·출판사가 정부로부터 매년 발행허가를 갱신해 받아야 한다. 역시 같은 명분으로 1948년에 영국이 시행했던 예비구금법은 말레이시아(1960년)와 싱가포르(1963년)의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구축되어 정권의 언론 장악과 언로 차단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밖에도 언론탄압에 종종 사용되는 공직기밀법(Official Secrets Act)과 선동법(Sedition Act) 또한 영국 식민지 시절의 유산이다. 2017년 12월 12일 로이터통신에 소속된 미얀마의 두 기자가 로힝야 문제를 취재하다가 함정수사에 걸려 체포되었을 때 그들에게 씌워졌던 공직기밀법은 영국 식민정부가 1923년에 제정했던 법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식민지 경험은 지배국과 식민지의 특성에 따라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미얀마는 영국),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협식민지 국가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티모르(동티모르는 포르투갈), 미국의 지배를 받았던 필리핀이 그것이다. 이 부류별 식민지의 특성이 각국의 언론을 특징짓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공산화를 거쳤던 구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의 경우, 언론은 전적으로 국가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여서, 경제 개방 노선을 걷는 베트남이나, 형식적으로는 다당제 입헌군주국이지만 실제로는 훈센 총리의 1인 독재체제가 장기화된 캄보디아나, 언론 통제가 심각하다. 세계최장기집권을 꿈꾸는 훈센은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양대 일간지(영어·크메르어)로 정부의 부정부패를 고발해 온 ‘캄보디아 데일리’와 ‘프놈펜 포스트’에 세금폭탄이라는 타격을 가해 2018년 7월 선거에서 재집권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2017년 9월 폐간된 ‘캄보디아 데일리’는 10월부터 온라인뉴스만 발행하게 되었고, ‘프놈펜 포스트’의 오스트레일리아 소유주는 신문을 훈센의 측근으로 알려진 말레이시아인에게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프놈펜 포스트’의 편집장이 해고되고 기자와 편집인들은 집단사표를 내고 떠나게 된다.

한편, 한국 국민의 인기관광지이자 급속한 경제 발전 덕에 ‘떠오르는 용’으로 부각된 베트남 사회의 이면에는 정부의 언론 통제에 반발해 지속적으로 싸우는 시민언론이 싹터나가는 중이다. 모든 언론사가 정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시민기자들은 대안언론의 역할을 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확산과 더불어 빠르게 성장 중인 시민언론에 대한 정부의 탄압 또한 만만치 않아, 비판 기사로 인해 구속된 다수가 페이스북 사용자나 블로거들이다. 국경없는기자회에 따르면, 2018년 언론자유지수에서 캄보디아는 전체 조사국 180개국 중 142위, 베트남은 175위를 차지했다.

▲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2018년 세계 언론자유지수. 국경없는기자회는 색깔별로 나라별 언론자유지수를 표시했는데 흰색은 ‘좋은 상황’, 노란색은 ‘만족스러운 상황’, 주황색은 ‘뚜렷한 문제’, 빨간색은 ‘어려운 상황’, 검정색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구분했다. 사진=국경없는기자회 제공
▲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2018년 세계 언론자유지수. 국경없는기자회는 색깔별로 나라별 언론자유지수를 표시했는데 흰색은 ‘좋은 상황’, 노란색은 ‘만족스러운 상황’, 주황색은 ‘뚜렷한 문제’, 빨간색은 ‘어려운 상황’, 검정색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구분했다. 사진=국경없는기자회 제공
한편, 해협식민지 국가들의 언론 통제 방식을 살펴보면, 정부가 대주주로 미디어 소유 지분을 갖고 언론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법제화를 통해 규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모든 신문사들은 매년 국가로부터 발행 허가를 갱신해 받아야 한다. 아시아 최초의 복합미디어기업인 ‘싱가포르 프레스 홀딩스’(Singapore Press Holdings, SPH)의 실질적 대주주는 싱가포르 정부이고, 말레이시아의 거대복합미디어기업 ‘미디어 프리마’(Media Prima)의 최대 주주는 ‘암노’(UMNO, 구(舊)여당연합 ‘국민전선’의 핵심 정당인 통일말레이국민기구)이다.

싱가포르는 1959년 영국 식민정부로부터 자치령을 인정받은 이후 단 한 번도 집권당이 바뀌지 않았고, 말레이시아 역시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래 집권세력이 바뀌지 않다가 2018년 5월 총선에서 드디어 61년만의 정권 교체를 평화적으로 이룩해냈다. 물론 그러기까지는 자유언론의 정신으로 비판과 진실 폭로의 펜을 멈추지 않은 언론인들의 활약과, 무엇보다도,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위해 수년간 전국적으로 캠페인을 벌여온 시민사회연합기구 ‘버시2.0’(Bersih 2.0)같은 시민들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던 덕분이다. 물론 결정적 계기로, 천문학적인 돈을 빼돌린 나집 라작 전 총리의 1MDB 스캔들이 기름을 부어준 덕분이기도 하다.

▲ 지난 2016년 11월19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앞에서 버시 2.0이 주최한 집회가 열렸다.
▲ 지난 2016년 11월19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앞에서 버시 2.0이 주최한 집회가 열렸다.
말레이시아의 구 여당연합이 61년간 통치할 수 있었던 토대가 되고, ‘개발언론’의 논리로 경제성장은 이루었으나 언론의 자유는 사라져버린 싱가포르에서 리콴유에서 리셴룽으로 권력 세습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집권당에 의한 미디어 장악과 언론 통제가 놓여 있다. 2018년 언론자유지수가 151위인 싱가포르에 비해 인도네시아는 124위를 기록했지만, 그 역시 1960년대에 신문들이 폐간되고 수많은 기자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세안 국가들 중 유일하게 미국의 식민지를 경험한 필리핀의 언론은 상대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다. 2018년 언론 관련 동남아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필리핀 언론인 엘렌 토르데실랴스(베라파일스 대표, 말라야 비즈니스 인사이트 칼럼니스트)에게 소감을 물었을 때 그녀는 부유한 싱가포르보다 가난한 필리핀이 언론의 자유 면에서는 훨씬 낫다고 피력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덧붙인 말은 다음과 같다. “싱가포르는 부자나라지만 미디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곳 사람들도 모른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모르고 판단할 수 없다. 아마 그들은 경제적 번영과 바꾸기 위해 언론 자유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반면, 필리핀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들 중 하나는 우리에게 자유가 너무 많아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특히 민주주의는 미국의 지배 이후 나아졌다고 말하기도 하고 언론은 미국식에 가깝다. 동남아지역 회의의 모든 토론들을 통해 한 가지 깨달은 것은 동남아시아 언론의 자유와 관련해 모든 나라들의 문제에 두루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해결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필리핀은 언론의 자유가 많은 만큼 살해되는 언론인의 수도 많은 나라이다. 진실을 말하려면, 길을 걸을 때, 차를 운전할 때, 어느 순간 뒤나 옆에서 총을 맞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필리핀의 ‘가문정치’와 언론 장악은 마르코스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코스의 ‘크로니 프레스’(Crony Press, 패거리 언론)에 대항해 싸웠던 대안언론 ‘모스키토 프레스’(Mosquito Press, 모기 언론)의 젊은 언론인들은 이제 두테르테의 ‘마약전쟁’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민중을 학살하는지 폭로하고 있다.

▲ 마약전쟁이 벌어지는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외곽지역.
▲ 마약전쟁이 벌어지는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외곽지역.
▲ 마약전쟁이 벌어지는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외곽지역.
▲ 마약전쟁이 벌어지는 필리핀 메트로마닐라 외곽지역.
지리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지만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버마(현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은 뜨겁고 지난했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버마인들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1988년 8월 8일 ‘8888 항쟁’이 일어난 후 군부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한 민주화운동세력에 의해 버마의 3대 망명언론이 탄생했다. 노르웨이를 기반으로 한 라디오 방송 ‘버마 민주의 소리’(Democratic Voice of Burma, DVB), 태국에서 만들어진 잡지 ‘이라와디’(Irrawaddy)와 인도에서 시작됐던 ‘미지마’(Mizzima)는 2012년~2013년 완전히 귀국해 TV, 일간지, 온라인 뉴스사이트로 발전했다.

▲ 양곤 ‘버마 민주의 소리 (DVB)’ 사무실에서 노르웨이 오슬로 망명시절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 양곤 ‘버마 민주의 소리 (DVB)’ 사무실에서 노르웨이 오슬로 망명시절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 88항쟁에 대해 설명하는 정치범지원협회(AAPP) 박물관의 코 코 아웅(Ko Ko Aung) 활동가.
▲ 88항쟁에 대해 설명하는 정치범지원협회(AAPP) 박물관의 코 코 아웅(Ko Ko Aung) 활동가.
미얀마는 2015년 11월 총선의 승리로 아웅산 수찌의 민주주의민족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이 정권을 잡았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군부이다. 군부가 이미 2008년 새로운 헌법을 통해 자신에게 합법적인 권력을 부여해 놓았기 때문이다. 국제적 이슈로 떠오른 로힝야 학살 문제가 수년째 해결되지 못하는 이유도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군부의 전략과 군부의 눈치를 보는 아웅산 수찌 집권당의 대응 때문이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버마 민중의 민주화 투쟁이 가져온 성과를 퇴색시키고 있으며 언론은 갖가지 사법적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언론 상황은 아직 어둡다. 취재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1970~80년대 독재정권에 탄압받아온 우리 언론과의 유사성이었고,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지 못해 제국주의의 부역자들이 권력에 군림하며 언론을 통제해 온 우리 역사와의 공통점이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독립운동 출신의 통치자들이 경제 개발과 사회 안정의 명분으로 언론을 억압해왔고 독재자의 가족과 측근들이 미디어를 소유해 언론을 장악하고 있다. 사법적 언론통제시스템은 일부 국가들이 힘겹게 성취해낸 정치민주화를 무력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는 아세안의 언론인들이 곳곳에 있다. 그들이 오늘도 용감하게 일하고 있음을 이 연재를 통해 독자와 함께 기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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