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적 근로시간제란 정해진 단위기간 안에 평균 노동시간을 주 52시간으로 맞추면 특정일·주에 법정 근로시간을 넘겨 일하도록 허용하는 제도다. 탄력근로제를 적용하는 기간엔 노동자가 하루 8시간 넘게 일해도 초과근로로 치지 않아 연장근로수당을 주지 않는다. 사업주는 일주일에 최대 64시간까지 근무를 시킬 수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노사 서면 합의로 최대 3개월이다.

노사정 대화기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는 지난 19일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확대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대다수 언론은 합의안을 두고 ‘양쪽이 한발씩 양보해 사회적 대화가 첫 결실을 맺었다’고 긍정 평가했다. 탄력근로제가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근본적으로 불리한 사실을 주요하게 지적하는 보도는 드물었다. 언론은 이번 합의안이 산하 의제별 위원회 결과물임에도 사실과 달리 ‘사회적 대화’가 마무리됐다고도 했다.

▲ (왼쪽부터)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 이철수 경사노위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장, 손경식 한국경총회장,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이 서울 경사노위 브리핑실에서 합의안을 발표한 뒤 박수 치고 있다. 중앙일보 20일 3면 갈무리
▲ (왼쪽부터)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 이철수 경사노위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장, 손경식 한국경총회장,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이 서울 경사노위 브리핑실에서 합의안을 발표한 뒤 박수 치고 있다. 중앙일보 20일 3면 갈무리

1. 근본은 노동권 후퇴… 적용 받는 노동자 입장 분석 드물어

합의안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늘렸을 뿐 아니라 시행 요건을 대폭 완화했다. 3개월 넘는 탄력근로제에 대해 사업주가 일별이 아닌 ‘주별’로 노동시간을 정하도록 했다. 일별 노동시간은 최소 2주 전 통보하게 했다. 업무량 급증 등 불가피한 사정이 생기면 노동자대표와 ‘협의’를 거쳐 주별 노동시간을 바꿀 수 있다. 사업주로선 직원의 노동시간을 놓고 재량권이 커지고, 노동자 입장에선 불안정해진다. 민주노총은 이를 두고 “이번 합의문에서 가장 심각한 개악”이라고 평했다.

한편 노동계의 임금과 건강권을 보호할 방안은 단서를 붙여 예외를 허용했다. 합의안은 3개월 넘는 탄력근로제를 시행할 경우 ‘11시간 연속 휴식시간’을 원칙으로 정했다. 노동자가 퇴근한 뒤 다시 일할 때까지 11시간을 쉬도록 의무화했다. 그러나 노사가 서면합의를 거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 탄력근로제 오남용을 막기 위해 사업주가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해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도록 했으나, 이 내용의 기준은 명시하지 않았다. 이 또한 사업주가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로 면제받을 수 있다.

이런 우려점을 지적한 보도는 많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재계 요구로 시작돼 정부와 정치권이 합의한 개악”이라며 “탄력근로제 확대가 우리 사회의 주 52시간 정착과 삶의 질 향상 노력에 찬물을 끼얹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분석 기사에선 해외 사례를 들며 단위기간을 1년으로 늘리자는 재계 주장에 “연간 노동시간이 길기로 손꼽히는 한국 현실을 평면 비교하기는 무리”라고 전했다. 서울신문은 21일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개악 야합은 무효’라는 반발이 속출한다며 탄력근로제 적용대상 업종 노동자들이 제기하는 우려점을 전했다.

▲ 21일자 서울신문 2면 갈무리
▲ 21일자 서울신문 2면 갈무리

그밖의 신문들은 ‘사회적 대화’를 환영하며 신속한 입법화를 주문했다. 일부 언론은 오히려 합의안이 기업 부담을 줄이는 데 역부족이라고 했다. 동아일보는 서면 합의를 조건으로 넣은 데 “노조 입김이 강한 대기업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중앙일보는 “일부 업종에서는 생산 주기 때문에 6개월도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매일경제·한국경제·서울경제 등 경제지는 임금보전과 건강권 보호가 지나치고 탄력근로제 도입요건이 까다롭다고 했다.

▲ 20일자 한겨레 사설
▲ 20일자 한겨레 사설

▲ 20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 20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2. ‘경사노위’안 아닌데 “국회로 공 넘어갔다”는 언론들

대다수 언론이 경사노위가 사회적 대화를 완료했으며 논의는 국회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합의안은 마지막 관문을 앞두고 있다. 노사정 대표가 모두 참여하는 본위원회 회의를 거쳐야 한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보도자료에서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포함한 논의를 종결하며 본위원회 등을 거쳐 국회에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합의안이 아직 ‘경사노위’ 차원 결과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경사노위 차원의 합의안이 법적 구속력을 지니지 않아 국회에선 또다른 논의 지형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본위원회 전체회의에선 합의안이 의결되지 않을 수 있다. 탄력근로제 확대는 미조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특히 불리하게 작용하는 탓에, 노동계 저대변층 대표 위원들 3명이 이에 보이콧할 공산이 있다. 경사노위 법에 따르면 본위원회가 열려 안건이 통과할 조건은 2가지다. 본위원회 회의는 각계 대표 위원들 각각 과반 출석하고, 출석위원 3분의2 이상 찬성해야 한다.

실제 3명의 저대변층 위원들은 경사노위 논의가 끝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여성 대표 나지현 위원은 “탄력근로제는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타격이 더 크다. 미조직 단위가 논의해 봐야 한다. ‘경사노위’ 합의라고 말하려면 본회의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 대표 김병찬 위원은 “아직 본위원회 통과가 안 된 마당에 언론이나 청와대에서 합의라고 보고자 하는 듯하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경사노위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 측은 25일 “본위원회 일정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3. 경영계가 요구한 정부 주도 ‘사회적 대화’?

언론은 이번 노사정 합의안이 ‘사회적 대화의 첫 결실’이란 점에 주목했다. 그러나 경영계가 이번 안건을 요구해왔고 여야정이 주도해 경사노위 출범 전부터 사실상 의제를 설정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화’라고 할 수 있느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를 지적하는 언론은 찾기 어려웠다.

▲ (왼쪽 위부터) 한국일보·세계일보·중앙일보 1면 머리 제목, 중앙일보 사설
▲ (왼쪽 위부터) 한국일보·세계일보·중앙일보 1면 머리 제목, 중앙일보 사설

한겨레는 20일 “애초 국회가 의제와 시한을 정해두고 사회적 대화를 요구한 것 자체가 ‘동원형’이라는 비판도 있었다”고 짚었다. 한겨레는 “주 최대 52시간제 시행에 대한 경영계 반발을 고려한 정부와 여당이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확대할 계획을 밝힌 것이 출발점”이라고 전했다. 경향은 19일 사설에서 “재계 요구로 시작돼 정부와 정치권이 합의한 개악”이라며 “사회적 대화가 불가능한 사안을 경사노위의 안건으로 올린 것 자체가 무리였다”고 평했다.

한편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의 합의안 관련 발언도 논란을 빚었다. 문 위원장은 과로와 산업재해 위험이 높아졌다는 지적에 “걱정 안 해도 된다. 요즘 젊은 분들이 그런 일자리를 싫어한다. 너무 그렇게 집중해서 시키면 (직장을) 나가는 거라, 현실적으로 지나친 우려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일보는 이 사실을 전하며 “장시간 근로로 힘들면 근로자가 알아서 퇴사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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