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킷벤키저’라는 회사, 혹시 기억하시나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일으킨 영국 회사죠. 대부분 이 회사를 ‘옥시크린’ 브랜드로 기억하실텐데, 이 회사가 1889년 라이솔이라는 만능 세정제를 출시한 바 있습니다. 미국·영국에선 굉장히 유명해요. 이 회사가 라이솔을 홍보하면서 이걸 희석해 욕실 청소나 과일 씻는데 뿐 아니라 질 세정에도 쓰라고 권유한 거예요. ‘당신의 결혼 생활이 잘 유지되길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이걸 쓰세요’라는 식의 문구와 함께요. 왜 질에서 나는 냄새 대신 소독약 냄새가 나야 하는 건가요? 옛날엔 무지해서 그랬을 거라고요? 최근 나오는 질 세정제들도 질에서 꽃향기가 나게 해준다는 광고를 합니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전문의의 강연 중 일부다. 윤정원·이은의(변호사)·박선민(국회 보좌관)·은유(작가)·오수경(자유기고가) 등 5명이 시사주간지 시사IN에 연재한 칼럼을 바탕으로 강남역 살인사건 2년을 맞아 진행한 강의 내용이 책 ‘불편할 준비’로 묶였다. 이들은 각각 몸·성폭력·정치·글쓰기·대중문화 등 다섯 가지 주제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봤다.

윤 전문의는 ‘여성의학에 스며든 가부장의 모습’을 살펴봤다. 요즘 산부인과 광고엔 이런 광고 문구가 많다. ‘이쁜이 수술’ ‘못난이 소음순’ ‘자신감 상실의 원인’ 등. 이상적인 소음순 모양은 좌우 대칭이어야 한다는 게 광고들의 메시지다. 윤 전문의는 “하다하다 이렇게 내밀한 부분까지도 세세한 관리를 하려 드는 구나 싶을 때가 많다”며 “외국에서도 ‘디자이너 버자이나’란 이름으로 질 축소술, 음순 성형술, 음순 미백 등이 행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학이란 정상성을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가른 다음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려는 학문이지만 정상의 범위는 생각보다 다양하다”며 “안면만 해도 좌우 대칭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성기의 크기, 모양, 유두 색, 피부색 모두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의학 교과서에서도 70kg의 남성 몸을 기준으로 삼고 있고, 한 해부학 교과서는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해부학 그림이 나오다가 끝에 여성 생식기 단원에만 여자 몸이 나왔다고 한다.

정상의 몸을 정해놓고 비정상을 설명하는 방식에 우린 익숙해져있다. 미국에 다이어트용 단백질 회사에서 이런 광고를 내놓은 적이 있다. ‘너 해변 갈 몸은 준비됐니?(ARE YOU BEACH BODY READY?)’ 광고에는 마른 백인여성이 비키니를 입은 사진이 함께 있었다. 그러자 이를 조롱하듯 패러디 광고들이 나왔다. 마르지 않은 다양한 인종의 여성이 웃고 있는 사진 옆에 ‘우리 몸은 준비돼있어(WE’RE BEACH BODY READY)’라는 문구가 있는 식이었다.

▲ 미국의 한 다이어트 제품 광고
▲ 미국의 한 다이어트 제품 광고
▲ 미국 다이어트 제품 광고를 패러디한 작품
▲ 미국 다이어트 제품 광고를 패러디한 작품

 

그동안 여성의 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건 백인·성인·남성·비장애인의 몸을 기준으로 봐왔기 때문이다. 윤 전문의는 여성의 눈으로 여성의 몸을 바라보기 위한 이들을 위한 책을 세권 추천했다.

‘마이 시크릿 닥터’(리사 랭킨 지음, 릿지 펴냄, 2014년)이란 책은 부제가 ‘내 친구가 산부인과 의사라면 꼭 묻고 싶은 여자 몸 이야기’인데 산부인과 의사가 여성의 몸에 대해 궁금한 점을 답하는 형식으로 쓰였다고 한다. ‘우리 몸 우리 자신’(보스턴여성건강서공동체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2005년)이란 책은 가부장 관점에서 쓴 의학서가 아니라서 추천했다. 한의학, 침술 등 온갖 의학정보를 집대성한 건강 바이블 성격의 책이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라는 책 역시 산부인과 의사가 쓴 건강 바이블인데 감정부터 노화를 대하는 자세까지 페미니즘 관점에서 썼다고 한다.

▲ 불편할 준비/ 윤정원 등 5명 지음/ 시사IN북 펴냄
▲ 불편할 준비/ 윤정원 등 5명 지음/ 시사IN북 펴냄

 

‘불편할 준비’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쉽게 들을 수 없어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그동안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불편했던 내용을 각 분야의 전문가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이은의 변호사는 자신이 평범한 직장인으로 당했던 성희롱을 문제제기해 변호사가 된 뒤 경험까지 친절하게 소개한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각각 우리가 장단점을 잘 아는 주변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객관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피해당사자를 고립시키지 않고 양비론이나 이분법 사고에서 벗어나는 게 관건이라고 그는 조언한다.

농사를 짓다가 민주노동당이 원내 진출하면서 보좌관으로 국회에 입성한 박선민 보좌관은 꼼꼼하게 각종 데이터를 들이댄다. 국회 안팎에서 여성이나 여성정책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여성 보좌관으로서 어떤 고충이 있는지 설명한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에 대한 기초적인 질문부터 여성들이 글을 쓰며 어떻게 자신을 돌아보고 때론 치유해갈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오수경 기고가는 드라마 덕후다. 한국 드라마의 흐름을 짚으며 여성이 어떻게 그러졌는지 보고 어떤 부분이 남성중심적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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