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김지은 전 비서) 증언 등을 보면 피고인(안희정 전 충남지사)이 이런 점(대중 앞에 서는 공허함·정치인으로서 고충 등)을 토로한 후 외롭다며 위로해달라고 하고 간음행위에 이르곤 했다는 것인데, 이는 안 전 지사가 대중 앞에 서는 정치행보에서 오는 공허함에 대한 위로를 찾는다는 심리와 더불어 일종의 나르시시즘·자기연민적 태도를 보여 안 전 지사를 지지하거나 흠모하는 여성의 위로를 유도한 것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다.”

안 전 지사 1심 판결문 중 일부로 한국 사회의 왜곡된 직업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갑의 책임을 을에게 떠넘기기 위해 공사구분을 무너뜨렸고, 재판부가 이를 승인했다. 정치인이 정치인으로서의 고민을 비서에게 얘기하고 지지나 조언을 받는 ‘노사관계’를 권력을 가진 남성이 “지지하거나 흠모하는 여성의 위로를 유도”한 ‘애정(불륜)관계’로 바꿨다.

이는 성관계로 이어졌다. “외롭다며 위로해달라고 하고 간음행위”까지 이르렀지만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정한 내심에 반하는 상황이더라도 현재 우리 성폭력범죄 처벌체계에서 안 전 지사의 행위가 처벌대상이 될 수 없다” 등의 이유에서다. 주목할 부분은 피해자 진심에 반하는 성행위라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인의 비서들은 소위 ‘심기경호’라는 관행으로 24시간 대기하는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불안정한 고용관계 속에서 감내해왔다. 안 전 지사 무죄판결의 의미는 이런 불합리한 관행에 ‘여성의 위로(2심 판단에 따르면 성범죄)’라는 업무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 왜 많은 여성에게 직장에서 남성 상사와 사적으로 얽히지 않으면서 ‘미움받지 않는 직원’이 되는 길이 쉽지 않은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돼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비서성폭행 관련 강제추행 등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법정구속돼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민중의소리

안 전 지사에게 가장 우호적인 판단을 한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만 일부 봐도 안 전 지사 아래서 피해자의 노동환경이 얼마나 열악했고 이런 노동조건에서 어떻게 인권을 착취당했는지 알 수 있다.

다수의 성관계·신체접촉은 야간에 이루어졌다. 한 예로 2017년 8월12일 늦은 시각까지 호프집에서 술자리가 있었고 13일 새벽 한 호텔에서 안 전 지사는 김 전 비서에게 ‘씻고 오라’고 했다. 재판부는 “당시 안 전 지사는 술에 취한 상태여서 정상적인 업무처리가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판단했다. 안 전 지사가 일과 휴식을 구분할 수 없게 비서를 노동착취한 상황이지만 재판부는 오히려 김 전 비서에게 왜 호텔방에 갔는지를 문제 삼았다.

미투 운동이 한창이던 2018년 2월24일 김 전 비서가 가족들과 저녁식사 중이었다. 김 전 비서는 서울 마포 오피스텔로 오라는 지시에 ‘바로 못 갈 것 같다’고 거절 의사를 표현했지만 안 전 지사는 ‘늦더라도 오라’고 지시했다. 김 전 비서는 25일 새벽 오피스텔로 갔다. 잠깐의 휴식을 빼앗으며 안 전 지사가 한 일은 김 전 비서에게 ‘미투하지 않겠다’는 답을 받아낸 일이었다. 이날도 성관계가 있었다. 역시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이다.

이는 권위적인 조직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1심 재판부는 안희정 대선캠프가 “상황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 상명하복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며 “소속 자원봉사자 가운데 선배들에 의해 껴안기, 뽀뽀 등 성추행을 당하거나 머리를 맞는 등 폭력도 다수 있었다”는 증언을 인정했다. 물론 재판부는 이런 분위기가 안 전 지사와 무관하며 충남도청의 분위기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봤다.

1심 재판부가 인정한 다른 사실을 보면 운전비서 P가 김 전 비서의 신체를 툭툭 치거나 만졌고, 김 전 비서에게 ‘여자 수행비서와 차에 단둘이 타니 좋다’ 등 성희롱 발언을 했다. 김 전 비서는 이를 당사자인 P, 비서실장 등에게 문제제기했다.

그러나 조직 내 또 다른 성폭력이 오히려 피해자에게 불리한 증거로 쓰였다. 재판부는 해당 문제제기를 근거로 김 전 비서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안 전 지사에게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하지 않았다고 봤다. 안 전 지사와 운전비서 P의 권력차이를 간과한 판단이다.

▲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와 시민 30여명은 지난해 11월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와 시민 30여명은 지난해 11월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이처럼 1심 판결이 대권주자 아래서 일하던 불안정 노동의 문제를 남녀관계로 변질시켰다면 2심 판결은 이를 두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관계 때문에 발생한 폭력으로 다시 규정했다. 사실 안 전 지사가 이미 신체접촉과 성관계 자체를 인정했기 때문에 검찰과 1·2심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가 크게 다르진 않다. 신체접촉과 성관계의 배경을 다르게 해석했을 뿐이다. 2심 재판부는 검찰이 제기한 10건의 성범죄 혐의 중 9건을 유죄로 봐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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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재판부는 김 전 비서가 어떠한 노동자였고 어떤 조건에서 일했는지 살폈다.

재판부는 “김 전 비서는 대선캠프에서 일할 때 ‘일의 노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고 안 전 지사는 평소 김 전 비서에게 수시로 ‘모두가 안 전 지사에게 노라고 할 때 예스를 해야 한다’며 수행비서의 자세를 말했다”며 “수행비서로서 도지사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수직적인 업무환경에 있어 안 전 지사의 요구에 반항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고 판단했다.

▲ 김지은씨. ⓒJTBC 보도화면 갈무리
▲ 김지은씨. ⓒJTBC 보도화면 갈무리
또한 재판부는 “안 전 지사는 김 전 비서 의사에 반해 업무상 위력으로 네 차례 간음하고 한 차례 추행했으며 네 차례 강제추행했다”며 “김 전 비서가 지방별정직공무원이라는 신분상 특징과 도지사와 비서라는 관계로 안 전 지사 지시에 순종해야만 하고 그들 사이의 일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취약한 처지에 있음을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 김 전 비서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현저히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약자는 순응을 기본으로 하고 아주 가끔 저항을 선택한다. 이 사건에서 쟁점이 된 성적 자기결정권을 포함해 모든 인권은 그것이 지켜질 수 있는 조건이 있어야 한다. 정규직 남성 노동자가 상사에게 폭행을 당한 명백한 증거를 확보하더라도 이를 사내에 문제제기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자신의 승진·사내 평판·혹시 모를 보복 등을 염려하며 참는 이들이 적지 않다.

▲ 지난해 3월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YWCA회관 앞에서 한국YWCA연합회원들이 '3.8 여성의 날 기념 미투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손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 지난해 3월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 YWCA회관 앞에서 한국YWCA연합회원들이 '3.8 여성의 날 기념 미투운동 지지와 성폭력 근절을 위한 손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김 전 비서에 대한 2차피해 중엔 그가 특정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안 전 지사를 음해하려 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김 전 비서는 지난해 3월5일 전국에 자신의 존재를 공개하기 직전까지 불안해하고 망설였다. 김 전 비서는 생방송 몇시간 전까지 자신의 엄마에게도 피해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이번 재판에서 채택한 증거인 김 전 비서가 방송 직전 JTBC 기자에게 보낸 문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JTBC 기자에게 “제게 중요한 건 단순 모욕 주기가 아니라 실질적인 처벌이고 진실을 밝히는 것입니다. 기사화에 거부 의사를 밝힙니다. 부디 보안 지켜주세요.”, “만약 수사와 진실을 밝히는데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를 막는데 도움 되지 않는다면 일체의 보도도 일체의 정보 공유도 원치 않습니다. 진실을 밝혀주실 수 없다면 소송만 매진하겠습니다.”, “도와주세요 기자님 저는 절실하고 무섭습니다 진실을 밝혀주세요”, “그런데 기자님 이건 이슈 거리가 아닙니다. 형사 사건입니다” 등을 보냈다.

이를 두고 2심 재판부는 “김 전 비서가 피해사실을 폭로하게 된 경위가 매우 자연스럽고 김 전 비서가 안 전 지사를 무고할 목적 등으로 허위의 피해사실을 지어내어 진술했다거나 안 전 지사를 무고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있다고 볼 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판단했다. 

2심판결 직후 김지은씨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안희정과 분리된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그 분리가 제게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화형대에 올려져 불길 속 마녀로 살아야했던 고통스러운 지난 시간과의 작별입니다. 이제 진실을 어떻게 밝혀야할 지, 어떻게 거짓과 싸워 이겨야할 지보다,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더 고민하려합니다. 그리고 제가 받은 도움을, 힘겹게 홀로 증명해내야 하는 수많은 피해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말하였으나 외면당했던, 어디에도 말하지 못하고 저의 재판을 지켜보았던 성폭력 피해자들께 미약하지만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와주시고, 함께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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