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서울 명륜동에서 1985년 문을 연 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이 폐업할 수도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 세 청년이 서점을 인수하겠다는 기사도 따라 나왔다. 이 기사에는 1993년부터 ‘풀무질’을 운영해온 은종복 대표와 함께 20대 세 청년들의 사진이 실렸다. 세 청년 가운데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한 사람은 로큰롤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의 전범선씨다.
로큰롤을 하는 그가 왜 사회과학서점 ‘풀무질’을 인수하게 됐을까. 그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미디어오늘은 24일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 전범선씨가 운영하는 채식식당 ‘소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전범선과 양반들’에서 보컬을 하고, 해방촌에서 사찰음식을 팔며, ‘두루미 출판사’의 대표이며 동물권단체 ‘동물해방물결’의 고문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는 그는 이전부터 헌책방을 열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역시 오랜 시간 헌책방을 운영하기도 했다.
책방 주인 은종복 대표는 세 청년들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을까도 궁금했다. 그가 처음 가게를 찾아간 날, 면접과도 비슷한 절차도 밟았다고 한다. 은 대표가 내건 조건은 △중노동을 할 수 있을 것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있을 것 △성실할 것. 이 세 가지였다고 한다.
“사실 저는 세 번째 성실성에서 탈락했다. 대표님이 절 보면서 ‘진득하니 앉아있지를 못할 것 같다’고 하셨다. 맞다. 그런데 같이 책방을 인수하기로 한 친구인 경수씨와 한준씨를 보고 인수를 결정해주셨다. 첫 번째 조건은 세 명 모두 혈기왕성한 20대이기에 합격했고, 두 번째 면접에서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은 대표가 ‘푸코의 책을 읽어봤느냐’와 같은 질문을 했고 저는 토마스 페인의 프랑스 혁명에 대해 쓴 석사논문을 들먹였다. 같이 갔던 한준씨는 서점에 들어서면서 ‘이론’(폐간된 사회주의 잡지)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합격했다. 준비한 멘트같다. 경주씨는 시를 쓴다고 하니까 합격됐다.”
그러나 책이 돈이 되지 않는 시대에 빚을 지고 있는 풀무질을 인수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풀무질이 지고 있는 빚 가운데 일정 부분을 갚기 위해 후원을 받아야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전씨는 책방이 사양산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회과학서점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 공간들은 반독재 민주화 세대들의 공간이었고, 시간이 지나 지금의 청년들과는 거리감이 있는 공간이 됐다”며 “풀무질에 들어가서 역사성을 잇는 작업을 해보고 싶다. 요즘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슈인 동물권이나 페미니즘 등에 대한 서적들도 많이 들여놓고 새로운 담론들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씨는 그가 대표로 있는 두루미 출판사를 통해 월북 사회주의 여성 해방 운동가인 허정숙씨의 글을 모아서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라는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풀무질이라는 게 성균관대의 학회지 이름이었다고 들었다. 전두환 시대에 일어난 혁명의 횃불, 불 질러 버리자는 강력한 의미였다. 지금 혁명은 횃불보다는 촛불이다. 그래서인지 불바다를 일으키는 풀무질이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은 개인의 인생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혁명이라는 큰 횃불보다는 개인적일 수 있지만 작은 삶 속에 마음에 불씨를 지피는, 그런 풀무질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역사 공부를 하면서 영국에 있는 유서 깊은 헌책방들을 돌아다녔다.
그는 풀무질을 통해 ‘한국의 역사적 단절’을 회복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저의 모든 화두는 ‘조선반도의 역사적 단절, 식민 경험과 전쟁 경험으로 인한 단절”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남북으로 단절돼있는 점, 옛문학이나 민요를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한복을 입으면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 등이 한국이 역사와 단절된 사례라고 말한다.
“저는 한글 세대이고 한자 문외한이다. 이런 단절이 책이라는 매체에서 확연히 드러나기도 한다. 풀무질을 이어나가면서 한국 사회의 역사적 단절을 회복하고 이어가고 싶다. 영국과 일본의 헌책방들을 참조해서 새로운 유형의 헌책방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