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최영애)가 기독교방송 CBS(대표 한용길)에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 벌어진 사실을 확인하고 CBS에 실효성 있는 성희롱·2차 피해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하도록 권고했다. 성희롱 예방교육을 권고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성희롱 피해자와 가해자의 격리조치까지 언급하며 회사의 구체적 책임을 명시했다. 여성단체 출신 인권위원장이 취임하고 최근 미투 운동으로 사회 분위기가 변하면서 이런 결정이 가능했다.

국회는 2017년 11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통과했다. 직장 내 성폭력 발생시 사업주 책임(사실확인 의무·피해자 근무장소 변경·유급휴가 부여)과 피해 노동자 보호조치(불리한 처우 금지)를 강화했는데 이번 결정에 개정안 내용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이 사건 진정인인 강민주 전남CBS PD는 미디어오늘에 “인권위 결정으로도 실질적인 구제가 가능해졌다”며 “미투 운동에 빚을 졌다”고 말했다.

▲ 기독교방송 CBS
▲ 기독교방송 CBS

강민주 PD가 성희롱 가해자인 윤승훈 전 전남CBS 국장, 전남CBS 전직 임원들, 한용길 CBS 대표 등을 상대로 낸 진정에 인권위는 지난 3일 “성희롱 피해자가 복직 후 다시 적대적 근무환경에 처해 원치 않는 경력 단절에 이르지 않도록 강 PD 의사를 적극 감안해 강 PD를 전남CBS 외 근무지로 전보조치하라”며 “CBS 본사·전국 지역방송본부에 구체적이고 실효성있는 성희롱·2차 피해 재발방지대책을 수립해 시행하라”고 권고했다.

인권위, 성희롱 사실·2차 피해 인정

인권위가 인정한 사실을 보면 강 PD는 지난 2016년 5월 전남CBS에 입사해 윤 전 국장에게 수차례 성희롱 피해를 당했고 두 차례 해고됐다가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다. 1차 해고 두 달 뒤인 지난 2016년 12월 조아무개 전남CBS 운영이사는 강 PD에게 “니가 평생 PD하려면 남들이 누가 이런 사람을 쓰겠냐” 등의 말을 했다.

지난해 2월 강 PD가 JTBC ‘뉴스룸’과 인터뷰로 미투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자 한 대표는 전 직원에게 △가해자(윤 전 국장)를 징계조치(대기 3개월)했지만 미흡했고 △2차례 해고는 성희롱 문제제기와 무관한 ‘계약기간 만료에 따른 조치’이며 △본사에서 전남CBS 인사권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 등을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강 PD는 누군가에게 “계약직 주제에 회사 더럽히지 말라”는 등의 메시지도 받았다. 노동부는 강 PD를 정규직으로 판단했다.

▲ 전라남도 순천에 위치한 전남CBS 사옥. 사진=전남CBS뉴스 페이스북
▲ 전라남도 순천에 위치한 전남CBS 사옥. 사진=전남CBS뉴스 페이스북

인권위는 두 차례 해고를 성희롱 문제제기로 인한 고용상 불이익이라고 봤다. 강 PD가 윤 전 국장 언행을 문제 삼자 윤 전 국장이 강 PD 수습평가 때 근무태도·품성에 낮은 점수를 줬고 채용거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CBS 본사에 “강 PD 주장을 조사해 성희롱 문제제기가 채용거부와 관련 있는지 진위를 가려야 함에도 명확한 사실 확인 절차가 없었다”며 “(한 대표 명의의 메시지에서) 보복 해고가 아니었다는 내용을 전 직원에게 공지한 건 피해자 입장을 충분히 살피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봤다. 이어 “강 PD가 모욕적 문자를 받은 등 정신적 피해가 가중됐고 직장 내 강 PD에 부정적 인식이 유포됐을 개연성도 있다”고 했다.

피해자·가해자 분리조치

인권위는 전남CBS가 약 15명이 근무하는 소규모 사업장인데 다른 구성원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을 수 있다며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사업주는 강 PD가 원하는 경우 전남CBS 외 근무지로 이동토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전남CBS 구성원들이 가해자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고, 전남CBS 운영이사가 강 PD를 비난했고, 운영이사회 등이 지역유지로 구성된 점 등을 고려해 “지역사회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하는 시사 PD로서 근무환경이 악화될 개연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 국가인권위원회. 사진=노컷뉴스
▲ 국가인권위원회. 사진=노컷뉴스

2차 피해 방지와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도 권고했다. 인권위는 “전남CBS 운영위원회가 오히려 성희롱 행위자에게 온정적 태도를 보이거나 조직의 명예 측면에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중대한 문제점이 노출됐다”며 “연 2회 성희롱 예방교육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한 한 대표가 전 직원에게 보낸 문자발송 이후 “강 PD에게 적대적 근무환경이 조성됐을 개연성이 상당하다”며 “2차 피해 예방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에 한국여성단체연합(대표 김영순·백미순·최은순)은 지난 28일 “언론계 미투운동에 국가인권위원회 결정을 환영한다”는 논평에서 “이번 인권위의 결정은 지난 한 해 동안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용기 있게 미투를 외친 모든 이들의 성과이며 지금도 힘겹게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며 “수많은 백래시(반발) 속에서도 미투 운동은 계속되고 있으며 한국 사회 성차별 구조에 대한 변화의 요구 또한 여전히 거세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이 단체는 “CBS는 이번 인권위의 주문을 속히 이행하여야 한다”며 “더 이상 여성노동자들이 성희롱으로 노동권과 생존권을 박탈당하지 않고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전 사회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위 권고 이후 CBS와 강 PD 측은 근무지 등 복직 조건을 두고 협상 중이다.

[관련기사 : 전남CBS 성희롱 피해자 “두 번 부당해고 당했다”]

[관련기사 : 성희롱 피해자는 아직도 CBS에 복직하지 못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